美에 신뢰 접는 EU… 메르켈 ‘안보 홀로서기’ 작심 선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30일 03시 00분


코멘트

멀어지는 美-EU


트럼프 美대통령
트럼프 美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메르켈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 후보일 당시부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고 독일의 과도한 무역 흑자 문제를 지적할 때마다 애써 참아 왔다. 올해 3월 백악관에서의 첫 만남 당시 악수를 거절당하는 수모를 당하고도 웃었다.

유럽 언론들은 그런 메르켈 총리가 끝내 동맹국 미국과의 결별을 작심한 듯한 발언을 한 결정적인 순간으로 25일 브뤼셀 나토 본부 신청사 준공기념식을 꼽았다. 나토가 2001년 미국의 9·11테러 이후 함께 대테러전쟁을 했던 순간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에서 트럼프는 “미국민의 세금을 그만 뜯어먹으라”고 나토 정상들을 몰아붙였다. 나토 정상 27명은 마치 교장의 훈계를 듣는 학생처럼 서 있었다.

트럼프는 동맹국이 공격을 당하면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자동 개입하도록 돼 있는 나토 협약 5조에 대해서는 지지 입장을 끝내 밝히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메르켈이 이번 만남을 통해 트럼프 정부하에 있는 미국은 독일과 유럽에 자동적으로 의지해 왔던 그런 신뢰할 만한 나라가 아니라는 결론을 명백하게 내렸다”고 분석했다.


이런 상황을 전제로 한 유럽의 대미 국방 독립 움직임은 현재진행형이다. 페데리카 모게리니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 대표는 18일 “EU 군사 미션을 담당하는 새로운 본부를 설립하고 EU 군사 펀드를 창설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독일을 포함한 EU 19개국이 참여할 계획이다. 국방 관련 연구와 훈련, 산업 활동에 쓰일 펀드는 연간 40억 유로 규모로 시작한다.

EU의 독자적인 국방 움직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되어 왔던 세계정치 질서 변화를 의미한다. 워싱턴포스트는 “원래 나토 설립의 목적이 ‘유럽 내 러시아 배제(OUT), 미국 인(IN), 독일 약화(DOWN)였다”며 “이제는 독일이 미국은 들어오지 말라고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메르켈은 유럽의 안보 홀로서기를 착실히 준비해 왔다. 지난해 9월 “미국이 뒤로 빠지기로 결정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지켜 낼 수 있어야 한다”며 프랑스 정상과 함께 유럽군사령부 창설을 제안했다. 미국에게서 나토 분담금 압박을 받느니 국방도 유럽 스스로 주도하겠다는 속내였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당선 이후 유럽 국방 통합은 급물살을 탔다. 마크롱은 대선 기간에 “워싱턴은 장기적으로는 우리 안보에서 발을 빼고 싶어 할 것이다. 결국 EU의 방어를 위한 전략적인 자율체를 창설해야 한다”며 독자 노선을 강조했다. 국방장관으로 여성 유럽의회 의원 출신을 임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슬람 급진주의 테러와 러시아의 영토 확장 정책, 중동 내전과 사이버 테러 등에 시달린 유럽은 EU의 통합 범위를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나토에 의존해 왔던 국방까지 넓혀야 한다는 공감대를 키워 오고 있었다. EU 전체의 국방비 규모는 세계 2위 수준인데 국방력은 한참 못 미치는 건 비효율적인 구조 때문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지난해 6월 영국의 EU 탈퇴 결정은 유럽군 창설 논의의 기폭제가 됐다. 미국과의 동맹을 강조해 온 영국은 그동안 EU 통합에 군사 분야가 포함되는 걸 극도로 반대해 왔다. EU 국방예산의 25%를 담당하는 영국의 EU 탈퇴는 충격이었지만 이참에 EU의 독자적인 군사 역량을 확충하자는 의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민간 군대까지 통합하고 방위 산업 협력도 늘리자며 EU 내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한 솅겐 조약을 본뜬 ‘국방 솅겐 조약’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

아직은 나토와의 협력을 고려해 EU 군대 창설은 언급하지 않고 이번에 창설된 EU 국방 본부도 당분간 ‘센터’로 부르기로 했지만 장기적으로 나토와의 충돌은 불가피해 보인다. EU 강경파들은 “EU 22개국만 나토 회원국”이라며 EU 독자 노선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당장 러시아의 위협 때문에 미국의 국방 우산이 절실한 폴란드와 헝가리 등 동구권은 메르켈보다 트럼프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 쉬운 길만은 아니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메르켈#트럼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