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허무 국감’]韓電서 송전탑 디자인 타령… 카메라 없으면 ‘봉숭아 학당’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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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들 맥빠진 질의 ‘맹탕 국감’

9월 11일 전남 나주시 한국전력 본사에서 열린 산업통상위의 국정감사. 의원들의 ‘무더기 지각’으로 예정된 시간에서 한 시간을 훌쩍 넘긴 오전 11시에야 국감이 시작됐다. 새정치민주연합 주승용 추미애 의원은 아예 오후에야 출석했다. 낮 12시 35분 점심 휴정을 하기 전 겨우 한 시간 반 사이에도 의원들은 지루한 듯 계속 휴게실을 들락거렸다.

의사 중계나 언론의 카메라가 없는 지방 현장에서의 국감은 국회 구태의 집약판이다. 바른사회시민회의가 모니터한 이날 산업위 국감장에도 이 같은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점심 뒤 오후 2시 5분에 재개하자 몇몇 의원은 자리에 앉아 대놓고 졸기 시작했다. ‘송곳 질문’은 실종됐다. 의원들은 한전 사장에게 “고철덩어리 송전탑이 흉물이다. 송전탑의 디자인을 친환경적으로 바꾸는 것은 어떤가”(새누리당 장윤석 의원), “전남이 관광적으로나 여러모로 좋은데 왜 발전하지 않는지…”(주승용 의원) 등 엉뚱한 발언을 쏟아냈다.

점심 이후 두 차례 더 휴정을 한 뒤 오후 6시 일찌감치 국감이 끝났다. 그나마 출석 의원 28명 중 9명은 이미 자리를 뜬 후였다. 바른사회시민회의가 모니터한 9월 11일 서울지방국세청의 현장 국감에도 출석한 의원 26명 중 14명이 감사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점심 이후 차례로 자리를 떴다. 국회 입성 4년 차이지만 의원들의 국감 역량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평가가 많다. ‘왕자의 난’으로 불리며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롯데 사태를 따져 묻기 위해 열린 정무위 국감에서 정작 의원들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에게 “인천 계양산(지역구)에 골프장을 건설하지 말라”는 식의 민원성 질의, 맥 빠진 발언으로 일관했다.

피감기관장의 정치적 편향성을 문제 삼은 것은 좋지만 편향성 때문에 기관 업무를 그르치는 사례를 명확히 꼬집지 못한 채 시종 윽박지르기 식의 설전만 이어졌을 뿐이다. 이옥남 바른사회시민회의 정치실장은 “의원들이 감정만 드러냈을 뿐 정확하게 따져 묻지 못하고 변죽만 울린 채 끝내니 ‘물 국감’ ‘쭉정이 국감’이라는 얘길 듣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공천룰’ 등 당 내분에… 김무성 1회, 문재인 5회 출석 ▼

여야 지도부 ‘국감 나 몰라라’


국감은 국회의 ‘한 해 농사의 결실’로 비유될 만큼 의정활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여야 지도부가 국감에서 소속 의원들의 활약을 독려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여야 지도부가 자신이 속한 상임위원회에서 보인 태도는 ‘낙제점’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특히 여야 대표들이 모두 당 내분의 중심에 서면서 정작 국감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위원인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올해 11차례 열린 국감에 첫날인 9월 10일 단 한 차례 출석했을 뿐이다. 이날 김 대표는 질의도 하지 않은 채 ‘눈도장’만 찍고 자리를 비웠다. 국방위원인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는 9차례 중 5차례 국감에 출석했다. 하지만 문 대표는 준비해 온 질의만 마친 뒤 국감장을 빠져나가는 일이 잦았다.

국감 전략을 진두지휘하는 원내지도부도 출석률이 저조했다.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외교통일위)는 50%, 새정치연합 이종걸 원내대표(정무위)는 70%였다.

올해 여야 지도부는 국감과 전혀 관계없는 당내 이슈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국감 전반기에는 문 대표가 재신임 카드를 던지자 당 내부는 친노(친노무현)-비노(비노무현)의 편 가르기에 몰두했다. 추석 연휴에 김 대표가 문 대표와 잠정 합의한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를 놓고 여권은 극심한 내홍에 시달렸다. 친박(친박근혜)-비박(비박근혜)계는 물론이고 청와대까지 끼어들어 국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생 국감을 외친 여야 지도부의 목소리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국감 도중 정의화 국회의장의 해외 순방에 여야 의원들이 동행한 것을 놓고도 논란이 일었다. 9월 13일부터 7박 10일 동안 중앙아메리카 3개국을 방문하면서 새누리당 최봉홍 양창영 박윤옥 의원, 새정치연합 홍익표 의원이 함께했다. 홍금애 국정감사 NGO모니터단 총괄집행위원장은 “여야 대표가 국감 등 의정활동을 공천에 반영하겠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관행적으로 국감에 빠지고 있다”면서 “여야 지도부가 솔선수범해 국회의원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 “어차피 형식적 답변” 작년 보고서 베껴 내는 기관들 ▼

피감기관 “일단 피하고 보자”


“재판환경 개선과 더불어 인적·물적 자원의 확충에도 힘써 심판 기간 준수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올해 1월 헌법재판소는 법제사법위에 제출한 ‘2014년도 국정감사 결과 시정 및 처리 요구 사항 조치결과’ 보고서에서 “현행법에 규정된 180일의 재판기일을 준수하라”는 국회의 지적에 이같이 답변했다.

이 문장은 2013, 2014년 국회에 제출한 보고서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2013년 보고서에는 토씨 하나까지 똑같이, 2014년 보고서에는 ‘심판기간 준수에’라는 부분만 ‘사건 처리가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 결과 기일을 지키라는 질의와 “알겠다”는 형식적인 대답은 19대 국회가 개원한 2012년 이후 4년 내내 붕어빵처럼 반복됐다.

법사위만 악습을 되풀이한 것은 아니다. 법률소비자연맹에 따르면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세 차례의 국감에서 똑같은 질의응답이 반복된 것은 총 242가지에 이르렀다. 이 중 상당수는 올해 국감에서도 그대로였다.

매해 반복되는 ‘맹탕질의’의 이면에는 “이번만 넘기자” 식으로 대처하는 피감기관들의 안이한 태도도 한몫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이 보고서를 살펴보면 막연한 시정요구 사항과 형식적인 시정 결과가 가득하다. “백화점, 마트 근로사원에게 인권침해적인 취업규칙을 강요하는 경우를 조사하고 개선하라”는 요구에 “개선토록 했다”(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부 소관 2014년도 국감)는 식이다.

홍 위원장은 “국회에도 레임덕이 있는지 19대 국회의 마지막 국감이다 보니 피감기관장의 답변이 오만하고 뻔뻔한 게 올해 부쩍 눈에 띄었다”며 “의원들이 이 같은 태도를 실력으로 눌러야 하는데 역량과 의지가 부족해 보였다”고 꼬집었다.

홍수영 gaea@donga.com·홍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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