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단 김정은, 통일각에 달려와 “북미회담 성공위해 최선 노력”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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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美 6·12정상회담 공식화]트럼프 초강수에 당혹… ‘南 중재’ 요청

한달만에 다시 만난 남북정상 포옹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6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정상회담을 마치고 포옹하고 있다. 10대 시절 스위스 유학을 한 김 위원장은 이날 얼굴 방향을 3번 바꾸면서 포옹하는 스위스식 인사를 했다. 청와대 제공
한달만에 다시 만난 남북정상 포옹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6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정상회담을 마치고 포옹하고 있다. 10대 시절 스위스 유학을 한 김 위원장은 이날 얼굴 방향을 3번 바꾸면서 포옹하는 스위스식 인사를 했다. 청와대 제공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25일은 아마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 중 하나였을 것이다.

전날 오후 10시 42분경,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갑자기 북-미 정상회담을 일방 취소하면서 김정은의 ‘벼랑 끝 전술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다. 25일 오전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을 통해 “아무 때나 마주 앉겠다”고 한 데 이어 급기야 오후엔 문재인 대통령에게 “만나자”고 SOS를 쳤다. 아무 반응 없던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이 유화적으로 변하자 23시간 만에 6·12 싱가포르 회담 카드를 다시 살렸다. 벼랑 끝 전술을 펴던 김정은이 ‘트럼프식 충격요법’에 하루 동안 천당과 지옥을 오간 셈이다.

○ 시진핑, 다롄서 김정은의 싱가포르행 붙잡은 듯

현대 외교사에서 전례를 찾기 드문 트럼프와 김정은의 비핵화 밀당(밀고 당기기)은 이달 초 전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7, 8일 중국 다롄(大連)에서 열린 북-중 정상회담에서 나눈 ‘밀담(密談)’이 화근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수의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다롄으로 온 김정은에게 미국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미국과 무슨 핵 협상을 하려고 하느냐. 지금 미국이 U-2 고고도정찰기를 북한 상공으로 띄워 (김정은 당신이) 뭐 하는지 다 감시하고 있는데 과연 백악관이 북한의 체제 보장을 하겠느냐”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 그러면서 중국 측이 파악한 미군의 최근 대북 정찰일지 중 일부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 그래도 당시 ‘강화된 핵사찰’ 등 트럼프의 각종 비핵화 요구에 골치 아파 하던 김정은은 시 주석의 말을 듣고 트럼프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토로했다. 김정은이 시 주석 앞에서 했다는 “미국이 (비핵화 논의 국면에서) 승전국과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김정은의 싱가포르행 결심은 서서히 흔들린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인 징후는 다롄 회담 8일 뒤인 16일 김계관 1부상의 담화다. “조미(북-미) 수뇌회담을 재고려할 수 있다”며 북-미 정상회담 취소 가능성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23일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이벤트에 한국 기자단을 ‘지각 입장’시키며 한미 양측과 기 싸움을 벌인 김정은은 24일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담화를 통해 “회담장에서 만나겠는지 아니면 핵 대 핵의 대결장에서 만나겠는지”라며 도발의 수위를 끌어올렸다.

○ 김정은, 거부 못 할 ‘비핵화 번개’ 카드로 반전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최선희 담화를 보고 24일 오후 10시 42분(한국 시간) 회담 취소라는 초강수를 던지자 평양은 아연실색한 것으로 보인다. 취소 선언 다음 날인 25일 오전 7시 반 김계관을 시켜 “수뇌 상봉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가”라며 트럼프가 전원 스위치를 꺼버려 박동이 멈춘 싱가포르 북-미 회담에 대한 ‘심폐소생술’에 나섰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 정도에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이에 김정은은 가장 믿어 왔던 정보 라인을 가동시켰다. 판문점에 북핵 실무 총책임자인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을 보내 서훈 국가정보원장을 만나 ‘긴급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한 것. 한미 공조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걸 바라만 봐야 했던 문 대통령이 거절하기 힘든 ‘깜짝 제안’이었다.

24일 강원 원산의 철도 완공 현장에 이어 25일 원산 갈마관광지구 현장시찰에 나선 김정은은 이날 오후 문 대통령이 회담을 받아들이자 평양으로 돌아와 26일 판문점으로 향했다. 차로 이동했다면 이틀 간 원산∼평양(211km)에 이어 평양∼판문점(175km)의 장거리 주행을 불사한 것이다.

문 대통령을 판문점 통일각에서 만난 김정은은 표정이나 말에서 절박함을 엿볼 수 있었다. “장소도 이렇고 잘 못해 드려서 미안한 마음”이라고 한 건 인사치레라기보다는 갑자기 주말에 불러낼 정도로 사정이 녹록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아무튼 트럼프의 초강수에 대처하기 위해 문 대통령에게 던진 김정은의 SOS는 트럼프의 얼어붙었던 마음을 돌려놓는 데 일단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25일 오후 10시경(한국 시간) 기자들과 만나 “(북-미 회담이) 심지어 12일이 될 수도 있다”며 김정은이 기다리던 말을 꺼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 기자가 “김정은이 당신과 게임을 하려는 것 아니냐”고 묻자 씩 웃으며 “모두가 게임을 한다”며 받아 넘겼다. 25일 전후 벌어진 김정은과의 1차 비핵화 수 싸움에선 이겼다고 스스로 여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청와대로부터 김정은의 SOS 소식을 전해 들은 뒤 이런 반응을 내놓았을 게 확실하다”고 말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북미정상회담#통일각#김정은#트럼프#중재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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