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에서 미국의 제39대 대통령 지미 카터는 두 인물로 읽힌다. 보수 성향의 일부 학자들은 그를 친(親)김일성 정치인이라고까지 평가하는 반면 진보 진영에선 1994년 북한 핵 위기 때 한반도를 전쟁의 위기에서 구한 인물이라고 본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56)가 7년여 집필 끝에 ‘카터 시대의 남북한―동맹의 위기와 민족의 갈등’을 최근 펴냈다. 그는 2011년 30여 년 만에 비밀 해제된 ‘카터 시기 한미 외교 문서’를 통해 1976∼79년 당시 한국과 미국, 그리고 북한의 관계를 연구해 왔다.
6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 교수는 “카터는 도덕주의자로 불리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인”이라며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면서도 북한의 인권 탄압과 5·18민주화운동 당시 한국 상황엔 눈감았던 걸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좌파 학계가 집필을 주도한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우파 학계 주도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저자로 모두 참여했던 중도적 학자다. 그는 또 ‘한국전쟁’(2000년) ‘삼팔선 획정의 진실’(2001년) 등 한국 냉전사(史)를 다룬 저서를 여러 권 냈다.
“카터 시기 한미 동맹이 위기에 빠졌던 건 박정희 정권이 핵무장을 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과 직접 접촉해 한반도 평화 체제를 구축하고, 한국의 핵 무장을 불필요하게 만들겠다는 것이 카터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미국은 1974년부터 한국의 핵 개발 움직임을 감지했다. 1977년 대통령이 된 카터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추진한다. “북한은 북-미 양자회담을 원했지만 카터는 남북한을 대화 테이블에 앉히는 3자회담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카터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동북아 외교의 핵심 의제로 삼은 이유를 세 가지로 분석했다. △전쟁 억제 △한국의 핵 무장 견제 △개인의 정치적 업적 달성이다. “카터는 냉전 종식을 자신의 정치적 업적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중동 최초의 평화협정이라 불리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1979년)도 그 일환인 거죠.” 하지만 카터가 추진했던 3자회담은 김일성의 거부로 성사되지 않는다.
카터는 퇴임 후에도 한반도 평화 사절로 나섰다. 1994년 북한 영변 핵 시설에 대한 미국의 선제타격론이 나왔을 때 카터는 이를 막기 위해 방북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훗날 선제타격하지 않은 걸 ‘임기 내 최대 실수’라 밝혀 논란이 됐다. 하지만 이 교수는 당시 카터의 행보가 옳았다고 평가했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북한을 선제타격하면 100만 명의 희생이 있을 것으로 분석했죠. 6·25전쟁 때 300만 명이 희생됐어요. 피의 대가로 평화를 얻는다 해도 온전히 치유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옳은 결정이었습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둘러싼 갈등과 도널드 트럼프 시대 개막, 북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 피살 등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동북아 정세에서 내달 출범하는 새 정부가 카터에게서 배울 점은 무엇일까. “대결 국면으로 가기엔 코리아 디스카운트 등 한국이 잃을 게 너무나 많습니다. 어느 정부가 들어서든 미국의 핵우산 아래 남북 간 대화협력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심지어 전쟁 중이라도 대화 채널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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