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서 촬영하던 英배우, 김일성·김정일 동상 앞서 주머니 손 넣고 있다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27일 16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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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No. No.”

어디선가 쏜살같이 등장한 북한 관리들이 영국 배우 마이클 팰린(75) 촬영팀에게 무려 세 번이나 ‘안 된다(No)’는 경고를 날렸다. 평양 만수대 앞 김일성 김정일 부자 동상을 참배하던 팰린이 격식을 차리지 않은 분위기 속에 촬영하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던 것. 북한 관리들은 이 장면을 다시 찍으라고 명령했다. 북한 최고 존엄인 김씨 일가 동상 앞에서 불경한 행동을 하면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공손 모드’로 급전환한 팰린은 동상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촬영을 마쳤다.

가디언, 텔레그래프 등 영국 언론에 따르면 코미디 시리즈 ‘몬티파이튼’ 출신의 유명 배우이자 여행가인 팰린은 2년여에 걸친 북한 정부와 협상 끝에 5월 촬영팀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했다. 약 두 주 동안 북한에 머물며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여행 다큐멘터리 2부작 ‘북한에서 마이클 팰린’(Michael Palin in North Korea) 상편이 27일 영국 현지에서 전파를 탔다. 하편이 방송되기도 전인데 벌써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코미디 배우인 팰린이 통제사회 북한의 수많은 규율을 지키려고 애쓰는 상황들을 재치 있으면서도 교훈적으로 담았기 때문이다. 이 다큐를 방송한 지상파 민간방송 ‘채널5’는 “‘리얼리티쇼를 줄이고 이런 퀄리티(양질) 프로그램을 늘려 달라’는 시청자들의 주문이 폭주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에서는 이 프로그램의 판권을 따내기 위한 방송사 경쟁이 벌어진 끝에 여행 전문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이 다음달 초 방송할 예정이다.

다큐에는 재미있는 장면들이 다수 담겨있다. 오전 5시부터 최강 볼륨으로 울려 퍼지는 북한 주민 기상용 음악 ‘장군님은 어디에’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나는가 하면 김씨 일가 동상을 찍을 때는 전신이 모두 담겨야 한다는 북한 규정 때문에 팰린이 동상 앞이 아닌 저 멀리서 얼굴이 분간도 안 되는 상황에서 대사를 읽는 장면도 있다.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일반 공항과는 달리 평양 공항에는 거의 사람이 보이지 않아 팰린이 ‘귀신공항’(ghost airport)이라고 별명을 붙이는 장면도 나온다. 영양 결핍 등으로 인해 평균 수명이 짧은 북한에서는 70대 중반인 자신을 완전 노인 취급한다고 툴툴거리는 장면도 있다. 그런가 하면 북한에서 75세 생일을 맞은 팰린은 감시인 2명이 케이크 등 생일상을 차려줬다고 감격하기도 한다.

5월 초 북한에 갔던 팰린은 북한 주민들과 어울려 노동절(5월 1일) 행사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 그는 다큐 방송 전 런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처음에는 북한 주민들이 아무런 감정 없는 로봇 같아 보였는데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과 친해졌다”고 말했다. 북한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 대해서는 “나는 코미디언이라 잘 모른다”고 운에 뗀 뒤 “북한은 변화를 원한다. 그런데 그 변화가 주민들이 아닌 지도자가 원하는 방향인 듯해서 걱정이 된다”고 강조했다.

북극, 히말라야 등에서 각종 탐험을 완수한 팰린은 “두 주동안 코카콜라와 인터넷이 없는 세상에서 살았다”며 “그렇지만 북한에 다시 갈 수 있다면 가고 싶다. 주민들이 나를 따뜻하게 맞아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미경 전문기자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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