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딸 비비안나 “부모 숙청한 공산당 혐오”

  • 입력 2004년 2월 29일 18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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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공산주의 운동에 바쳤던 부모님이 북한과 소련에서 숙청된 것은 우리 가족의 비극일 뿐 아니라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러시아 모스크바 시내 다닐로프 공동묘지. 여성 공산주의운동가로 유명한 주세죽(朱世竹·1901∼1953)이 묻힌 곳이다. 주세죽은 광복 직후 재건된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를 지낸 뒤 월북해 북한의 부수상 겸 외상을 지내다 1953년 ‘미제 간첩’으로 몰려 숙청된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朴憲永)의 부인.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혈육으로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무용가 박 비비안나씨(76)는 반세기가 지나도록 부모의 비극적인 최후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박씨의 생존 사실은 옛 소련 개방 후인 1991년 국내에 알려졌다. 박씨는 당시 일부 언론의 태도가 불쾌해 지금까지 언론 접촉을 거부해 왔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남편(빅토르 마르코프)의 죽음을 계기로 생각을 바꿔 더 늦기 전에 비극적인 가족사를 공개하기로 하고 최근 동아일보의 인터뷰에 응했다.

“1938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위험분자로 몰려 중앙아시아로 유배됐던 어머니는 1953년 나를 보기 위해 모스크바로 몰래 왔다가 병사했습니다. 나는 당시 지방공연 중이어서 남편이 임종을 지켜봤습니다. 그래도 무덤이라도 있는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행복한 편입니다.”

박헌영은 1955년 12월 처형됐다고만 알려져 있다. 북한에서 재혼한 세 번째 부인 윤 레나와의 사이에서 난 남매의 운명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

박씨는 박헌영 부부가 일제의 추적을 피해 다니던 시절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육아원에서 자랐다. 혁명운동에 전념하던 부모가 돌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가끔 나를 찾아왔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얼굴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박헌영은 1933년 일제에 의해 체포된 후 연락이 끊겼다. 1946년에서야 아버지가 ‘조선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정도. 소련을 방문한 아버지를 재회했을 때도 “너무 낯설었다”고 회고했다. 박씨는 1949년 평양에 잠시 머무르며 월북 무용가 최승희(崔承喜)에게 한국 무용을 배우기도 했다.

“그때 함께 살자는 아버지의 말을 뿌리치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때 북한에 남았으면 자신도 숙청됐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고 했다.

모스크바 다닐로프 묘지에 있는 어머니 주세죽의 무덤 앞에 선 박 비비안나. 묘비에는 주세죽의 당명인 한 베라(1901∼1953)라고만 쓰여있다. -김기현기자

“아버지는 나를 만나서도 어머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습니다.”

박헌영은 소련당국에 의해 숙청돼 유배 중인 부인의 존재가 새삼 부각되는 것이 불편했던 듯하다. 주세죽은 1946년 5월 “고국으로 돌아가 남편을 돕겠다”고 스탈린에게 석방을 청원했으나 소련 당국은 이를 묵살했다.

박헌영은 1949년 재혼해 주세죽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했다. 박씨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새어머니’ 윤씨가 모스크바에 머물며 둘째 세르게이를 낳았다고 증언했다. 박씨는 당시 이복동생들을 돌봤다. 박씨는 “북한 정부가 두 동생의 생사라도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씨는 비극적 가족사 때문에 평생을 공산주의를 혐오하며 살았다. 공산당 입당도 거부했을 정도. 스스로 선택한 이념 때문에 비극적 삶을 자초한 어머니도 “네가 무용을 하고 결혼도 정치와 상관없는 화가와 한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주세죽은 옛 소련 정부에 의해 1989년 복권됐다. 박씨는 “아버지도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을 맺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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