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 정부의 외교실패, 대가는 국민이 치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3일 13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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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IMF 위기’로 기억하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일본과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1995년 11월 김영삼(YS) 대통령이 일본의 역사 망언과 관련해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일격을 날린 이후 독도, 위안부, 한일 어업협정 문제까지 겹쳐 97년 11월 한일갈등은 최고조에 올라 있었다.

11월 6일 독도 접안시설 준공식이 열리자 자민당 의원들은 ‘일본 국토의 침범’이라며 흥분했고, 우리 외무부는 “한국 영토인 독도에 대해 일본 정부는 다신 문제를 제기하지 말라”고 시퍼런 논평을 날렸다.

●한일 외교전쟁 중 닥친 IMF위기

그 무렵 우리 금융시장은 날개 없는 천사처럼 추락 중이었다. 10월 28일 미국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이 하루 변동폭 하한선까지 떨어져 외환거래가 일시 중단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11월 들어선 ‘서울을 떠나라’(5일 블룸버그 통신), ‘한국은 동남아 외환위기를 능가하는 위기상황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6일 월스트리트저널)는 외신이 줄을 이었다.

다급해진 정부는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재정경제원의 엄낙용 제2차관보가 11월 10일 일본에 급파돼 ‘미스터 엔’이라는 대장성의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재무관을 만났다. 그러나 다음날 빈손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정부가 IMF를 통해서만 유동성 위기에 처한 국가를 지원하기로 미국과 합의했다며 우리 정부의 요청을 거절한 것이다.

여기서 ‘외환위기를 촉발시킨 직접적 원인은 1997년 여름 일본 은행들이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한 것’이라는 2016년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의 논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8년 글로벌위기 때는 달랐다

물론 외환위기의 원인이 일본이라고 콕 찍는 건 아니다(일일이 열거하다간 날 새고 만다). 외교 갈등을 보복하기 위해 일본 은행들이 일부러, 무자비하게 돈을 빼갔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실제로 일본도 금융위기가 닥칠까봐 국제결제은행(BIS)이 정한 자기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해 자금 회수를 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만일 일본과 최상의 외교관계였어도 미국 핑계로 도움을 거절당했을까. 국가 대 국가의 지원은 아니어도 만기 연장의 행정지도나 통화스와프 체결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서 그렇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이명박 정부는 미국과 통화스와프를 맺어 빠르게 금융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 시절 재경원 차관으로 있으면서 ‘미국의 힘을 빌려야 글로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당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미국과의 통화스와프를 추진했지만 쉬웠을 리 없다. 외교는 그래서 중요하다. 사공일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은 “대통령이 평소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외교관계를 잘 맺어왔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왔다”고 했었다.

●외교 실패가 경제위기 악화시켰다

IMF 구제금융 협상 과정에서 우리 측 대표를 맡았던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외환위기 징비록’(2008년)에 이렇게 기록했다.

‘미국과 일본이 한국 정부의 요청을 거절한 데에는 정부의 통상정책에도 원인이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미국과 통상 문제를 놓고 협의하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와 업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또 한국 정부는 일본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평소 원만하지 못했던 외교관계로 인해 시장의 실패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정부의 마지막 기대마저 무산된 것이다.’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놓고 일본이 경제 보복을 시작한 지금, ‘역사는 반복되는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을 다시 보는 느낌은 섬뜩하다. 외교 실패의 대가를 또 국민이 치를까봐서다.

작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판결 이후 일본 정부는 우리 정부에 해결책을 찾자고 다양한 경로로 요구했지만 정부는 ‘무대응’으로 대응해 보복을 자초했다.

●“한일관계를 국내정치에 이용 말라”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 수출을 제한하는 치명적 조치에 대해 우리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언급하자 아베 신조 총리는 2일 “일본은 모든 조치는 WTO와 정합적”이라며 일축했다. 1997년 여름 한국산 컬러TV와 반도체에 반덤핑조치를 취한 미국을 우리 정부가 WTO 제소하자 미국이 “자국의 반덤핑 법규와 관행은 전반적으로 WTO협정에 합치한다”고 했던 딱 그 반응이다.

YS가 외교를 망친 데는 ‘문민 대통령’이라는 지나친 도덕적 자부심도 작용했다고 본다. 외교적 능력도 능력이지만, 민주화운동 출신이라는 정당성에 사로잡혀 앞뒤 가리지 않고 일본을 공격했다. 선거에선 불타는 민족주의가 나쁘지 않다는 정치적 이유도 작용했을 터다.

‘촛불정부’라는 도덕적 자부심에 불타는 문재인 대통령도 “한일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과거사 문제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지 않아야 한다”며 일본을 겨냥한 바 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역시 관제 민족주의를 친일파 척결, 적폐청산 같은 국내 정치용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국민은 모르지 않는다. 한미일 3각 안보협력 회피를 위해 한일관계 악화를 즐긴다는 의심도 없지 않다.

지난달 28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개막 환영식에서 ‘8초 악수’만 한 뒤 등 돌리는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오사카=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지난달 28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개막 환영식에서 ‘8초 악수’만 한 뒤 등 돌리는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오사카=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북한만 잘되면 모든 문제 사라지나

IMF위기가 또 닥칠 수 있다고는 생각도 하기 싫다. 그러나 우리 경제는 세계 경기와 딴판으로 하강곡선을 그리는 현실이다. 만에 하나, 큰 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를 도와줄 우방이 있는지 이 정부의 외교실력이 걱정스럽다.

IMF위기가 ‘위장된 축복’이라는 말도 없진 않다. IMF의 압력이 있어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털어낼 수 있었다는 결과적 분석이다. 당정청이 오늘 발표한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개발 매년 1조 원 투자’ 계획이 우리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일관계는 이대로 갈 수 없다. 나라가 이사를 갈 수도 없다. 이 정부가 북한에 공들이는 것의 반(半)에 반만 외교에 신경 써도 실마리는 찾을 수 있다. 나라 밖에서도, 안에서도 북한만 잘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올인 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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