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美 합의문 발표 뒤 소외당한 한국 “청구서만 받는것 아닌가” 우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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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미국의 ‘2·29 합의’에 대해 전문가들은 “합의와 이행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지적한다. 일단 북한 핵개발을 둘러싼 한반도 정세가 ‘관리 국면’에 진입했지만 앞으로 합의 내용의 이행 시기, 방식 등을 놓고 충돌하면서 난항을 겪을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 같은 합의, 서로 다른 속내


무엇보다 북-미 양측이 각자 발표한 합의 발표문 곳곳에서 발견되는 미묘한 표현의 차이는 서로 다른 속내를 짐작하게 한다.

북한은 합의 내용을 발표하면서 미국이 24만 t의 영양 지원을 약속했다는 내용을 앞세우고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중단 결정은 맨 뒤로 뺐다. 반면 미국은 이를 첫 줄부터 언급했다. 서로의 강조점이 다른 만큼 무엇을 이행하는 게 먼저냐를 두고 다툴 소지가 있다.

특히 UEP 중단에 대해 미국은 ‘모라토리엄(유예)’이라고 쓴 반면 북한은 구속력이 약한 ‘임시 중지’라는 용어를 썼다. 이는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와 이후 6자회담에서 사용된 ‘동결(freeze)’이나 ‘폐쇄(shutdown)’ ‘불능화(disable)’보다 수위가 약하다.

더욱이 북한은 ‘결실 있는 회담이 진행되는 기간’이라는 전제조건을 달아 향후 회담이 교착되면 언제라도 UEP 가동을 재개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북한이 플루토늄 핵개발에 이어 우라늄을 사용한 핵개발 협상에서도 핵 폐기까지의 과정을 여러 단계로 쪼개는 ‘살라미 전술’을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이 ‘경수로 제공 문제’를 언급한 반면 미국은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은 점도 눈에 띈다. 정부 당국자는 “합의 내용에는 없는 것을 북한이 일방적으로 끼워 넣은 것 같다”고 말했다. 경수로에 대한 북한의 집착과 요구 강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또 북한은 정전협정의 준수를 언급하면서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이 역시 미국 쪽 발표에는 없는 내용이다. 체제 보장을 위해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해온 북한이 앞으로 이를 계속 압박 카드로 쓰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추가 식량 지원과 관련해서는 미국이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고만 밝힌 반면 북한은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대북 제재에 대해서도 각각 ‘미국이 민수 분야를 겨냥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북한), ‘북한 주민의 일상생활 제재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미국)라고 밝혀 뉘앙스가 사뭇 다르다.

○ 고개 드는 비판과 의문


이런 북-미 간 발표 내용의 차이는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점을 보여준다.

당장 북한의 UEP 가동 중단 약속은 언제든 시설을 재가동할 수 있는 가역적 조치다. 미국의 고위 당국자도 “이번 합의는 뒤집을 수 있는 것이어서 북한이 스위치를 내려버리고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 다만 그는 “그렇게 하면 북한은 기회를 잃는 것이고, 6자회담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북한에는 아주 다른 미래가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번 합의가 곧바로 6자회담 재개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한미 양국의 당국자들은 6자회담 재개 전망에 대해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과거 북핵 협상에서도 북한에 식량과 경수로를 내주고도 핵개발을 막기는커녕 시간만 벌어준 전례가 많았다.

미국 당국자는 “그저 회의를 위한 회의는 의미가 없다. 결실을 보고 의자에서 일어날 때는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야 한다”며 “UEP 중단 과정에서 아주 힘든 협상이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 당국자도 “핵심은 서로가 ‘동시 행동의 원칙’에 따라 약속한 내용의 이행 순서를 어떻게 짜서 서로 맞물리느냐는 것이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한편으로 한국 정부 안팎에서는 ‘제네바 합의 때처럼 협상에서는 배제된 한국이 돈 청구서만 받아 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당시 한국은 북-미 회담에 일절 관여하지 못한 채 경수로 건설비용 15억6200만 달러 중 70% 이상을 부담했다. 북-미 양국이 이번 합의문에서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한 내용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 서두르는 북-미 간 후속 행보


앞으로 양측은 일단 합의된 대로 예정된 이행 조치를 서둘러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대북 영양 지원에 대한 후속 논의를 위해 조만간 이근 북한 외무성 국장과 로버트 킹 미국 대북인권특사가 만나 구체적인 지원 시기와 모니터링 방식을 협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당국자는 “매달 2만 t의 영양 지원 물품을 12개월에 걸쳐 제공하겠다고 북측에 제안했다”며 “북측과 가급적 빨리 접촉해 세부사항을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모니터링 요원들이 북한에 사무실을 열고 활동을 시작한 뒤에야 식량을 보낼 방침이다.

합의의 핵심인 UEP 중단과 관련해서는 북한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간 논의가 이뤄지게 된다. IAEA는 합의 발표 직후 “북한으로 돌아갈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IAEA 사찰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라늄농축 시설의 가동 스위치를 내릴 것인지, 중단 이후 IAEA 사찰단이 들어가 검증하는 방식이 될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실무 협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아울러 북-미 양측이 문화, 교육, 스포츠 분야의 인적 교류를 증대시키겠다고 합의한 만큼 형식적 차원에서라도 성과를 보여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현재 학계를 중심으로 북한 6자회담 수석대표인 이용호 외무성 부상을 초청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워싱턴=최영해 특파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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