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트럼프, 즉각적 이익에만 열정… 실적 안나오면 “넌 해고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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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주가 부진한 CEO 교체하듯… 틸러슨 美국무장관 전격경질


미국 민주당 빌 클린턴 행정부와 공화당 조지 W 부시 행정부를 거쳐 다시 민주당 버락 오바마 행정부까지, 대통령 취임 선서가 여섯 번 낭독된 24년(1993∼2017년)간 미국의 국무장관은 정확히 6명 존재했다. 워런 크리스토퍼가 클린턴 정부의 초대 국무장관이었고 존 케리가 오바마 행정부의 마지막 외교사령탑이었다. 이들은 대통령이 첫 임기를 시작하거나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해의 1, 2월에 국무장관직을 맡아 1400일 이상 세계 최강 미국의 외교를 진두지휘한 뒤 워싱턴을 떠났다. 이처럼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임기 4년을 함께 보내며 국정 안정과 연속성을 책임지는 건 일종의 전통으로 굳어져 왔다.

하지만 부동산 재벌 출신의 ‘워싱턴 아웃사이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일종의 ‘국정 안전핀’ 역할을 해온 이 전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깨버렸다. 약 1년 2개월간 외교사령탑을 맡아온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을 13일 전격 경질한 것이다. 그것도 트위터를 통해 핵폭탄급 뉴스를 터뜨렸다.

전통을 낡은 관행으로 치부하고, 전임 행정부를 철저히 부인하는 데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는 트럼프다운 행보라는 평가가 나온다. ‘청개구리’ 근성의 결과물이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가족을 백악관 참모로 등용하고 장관들을 공개적으로 면박하는 데 익숙한 점을 고려하면 사실 크게 놀랍지 않다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트럼프가 마냥 딴지만 거는 청개구리가 아닐 수 있다. 일부 정치평론가는 북-미 정상회담 등 중요 현안이 산적한 상태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오로지 결과물 하나만을 바라보며 걸림돌을 치우는 ‘극실용주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해석한다. 갑작스러운 국무장관 경질은 ‘혼란왕(King chaos)’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측면이 있지만 트럼프 행정부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국무장관의 교체가 전체적인 팀워크를 위해 필요했다는 시각이다.

○ “자신의 즉각적인 이익에만 열정 갖는 사람”

“트럼프는 깊이 있는 사상적 신념은 전혀 없었고, 자신의 즉각적인 이익을 제외하면 그 무엇에도 열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트럼프 자서전 ‘거래의 기술’을 공저한 작가 토니 슈워츠는 트럼프 대통령의 심리를 분석한 글을 모아 최근에 출간된 저서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쉽게 분노하며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하지만 폭발적인 성격이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는 데 쓰일 때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전격적으로 이뤄진 틸러슨 경질에는 트럼프의 최고경영자(CEO)적 성향이 잘 드러나 있다. 틸러슨에게 제대로 된 업무 수행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트럼프의 귀에 꾸준히 들려왔다. 트럼프는 북핵 문제와 관련해 강경 메시지를 주문했지만 틸러슨은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며 유화 메시지를 발신했다. 틸러슨은 또 과도한 구조조정 등의 이유로 국무부 내부에서 신망을 잃기도 했다. 결국 사면초가에 몰린 틸러슨 장관과 함께 북-미 정상회담 같은 중요한 현안을 처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트럼프 대통령은 마치 기업의 대주주가 실적이 부진한 CEO를 교체하듯이 틸러슨에게 ‘해고 통지서’를 보냈다.

보수 성향 칼럼니스트 휴 휴잇은 13일 워싱턴포스트(WP) 칼럼에서 “갑작스럽고 다소 혼란스러운 변화였지만 국가안보를 위해 틸러슨 해고는 필요했다”고 평가했다. 전통과 관행을 깨는 파격 행보이지만 원활한 일처리를 위해 자신과 코드가 맞지 않은 참모와 작별하는 건 오히려 국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공화당 ‘적대적 인수’ 완료 신호?


감세와 자유무역을 옹호하고 극단적인 국수주의 성향을 자극하는 극우 포퓰리스트를 경계해온 공화당이 완전히 ‘트럼프화’됐다는 비판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연설비서관으로 일했던 모나 채런은 지난달 뉴욕타임스(NYT)에 올해 보수주의연맹(ACU) 연차총회인 보수정치행동회의(CPAC)에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FN) 차기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는 마리옹 마레샬르펜이 초대된 것을 거론하며 “보수주의자들이 유럽의 국수주의자들에게 문을 열어줬다”고 비판했다.

틸러슨 경질은 트럼프 대통령을 위시한 포퓰리스트들의 공화당 ‘적대적 인수’의 연장선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틸러슨은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 주류 세력 사이에 이뤄진 ‘보기 드문 합의’가 낳은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낸 콘돌리자 라이스와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게이츠가 트럼프에게 국무장관 후보로 적극 추천했던 인물이 바로 틸러슨이었다. 하지만 트럼프 ‘충성파’ 마이크 폼페이오가 국무장관직을 차지하면서 공화당 주류가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낼 수 있는 목소리는 더 줄어들게 됐다.

○ 다음 경질 1순위는?

취임 1년을 갓 넘긴 트럼프 대통령이 확실히 국정을 장악하겠다며 참모진 교체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다음번엔 어떤 각료가 해고 통지서를 받을지가 큰 관심사다.

CNN은 13일 1순위 경질 대상자로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을 꼽았다. 세션스는 러시아의 미 대선 개입 의혹에 관한 특검 수사에 소극적으로 대응해 이미 트럼프의 눈 밖에 난 지 오래다. 최근 WP는 트럼프 대통령이 세션스 장관을 ‘미스터 마구(Mr. magoo)’라고 비난했다고 보도했다. 미스터 마구는 나이가 많고 근시안적이며 도박에 빠진 만화 주인공이다. 2순위는 데이비드 셜킨 보훈장관이다. 셜킨 장관은 지난해 영국으로 외유성 출장을 다녀온 사실이 드러나면서 물의를 빚었다.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교체 대상으로 유력하게 거론된다. 올해 들어 경질되거나 사임한 사람은 10명이 넘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14일 트위터에 “미 상원의 민주당 때문에 수백 명의 좋은 사람이 (인선에서) 차단되거나 지연되고 있다. 이런 방해 탓에 정부의 많은 요직이 공석으로 남은 것이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일이다”라고 말했다.

한기재 record@donga.com·주성하 기자
#트럼프#틸러슨#경질#공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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