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방에서 눈을 뜰 때마다 이곳이 어디인지 기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책꽂이에 붙어있는 준혁이의 사진과 창 너머 낡은 연립주택 벽이 보이면 오늘이 며칠 째인지 생각했다. 기자는 경기 안산 단원구 고잔동에 있었다.

고잔동의 시계는 4월 16일에 멈췄다. 골목길을 왁자하게 채우던 단원고 아이들 250명(사망·실종)은 그날 한 순간에 사라졌다. 부모들은 휴직했고 동생을 잃은 형과 언니는 휴학을 해 아침이면 단원고와 유가족 천막으로 향했다. 식당 사장도, 문구점 주인도, 파출소 직원도 한창 다른 이야기들을 하다가도 결국 ‘아이들’ 이야기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이곳은 세월호 이후의 고잔동이었다.

기자는 8일부터 14일까지 6박 7일간 2학년 5반 생존 학생 박준혁 군의 집에서 함께 지냈다. 단원고를 중심으로 북쪽의 와동(99명)과 남쪽의 고잔1동(108명)은 단원고 피해 학생(사망·실종자와 생존자)들이 가장 많이 살던 곳이다. 기자는 일주일간 이 두 곳을 걸어 다니며 남겨진 이들의 모습을 꼼꼼히 기록했다. 안산=곽도영 기자 now@donga.com        ▲ 단원고 생존학생 그림으로 본 심리상태 바로가기

하늘공원

-세월호 희생 학생들의 납골당
-학생들 위패와 함께 추모 편지가 쌓여 있음

희생학생 전출가구1

희생학생 박모 양이 살던 집.

꽃빛공원

-고잔동 북동쪽에 있는 녹지 공원
-추모 공원 조성 논의 중
-희생 학생들 위패와 이들에 대한 기억을 모을 예정

준혁이네집

생존학생 박준혁 군의 집

희생학생 전출가구2

희생학생 김모 양이 살던 집

합동분향소

-화랑유원지 안에 있음
-정부 공식 세월호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방문자수는 감소 추세
-7월6일(일)에는 900명 방문

고잔1동 주민센터

-피해자 복지 관리의 실질 거점
-유가족들에게 반찬 배달 해오다 더위로 중단
-생필품 배달 방안 검토 중

명성교회

-단원고 정문 바로 옆 교회
-희생학생 양온유 양이 가족과 살던 곳
-참사 이후 양 양 부친은 분향소에서 머무름

놀러와 분식

-단원고 등굣길 길목에서 6년째 영업 중
-희생 학생들이 중학생이었을 때부터 단골
-주인 아주머니는 희생 학생의 시를 코팅해 간직

고잔동 파출소

-등하교 시간에 단원고 앞에 순찰차가 대기
-부모들이 진도로 갔을 때 빈집을 지킴
-경찰관 13명, 순찰차 5대가 상시 순찰

유가족 천막

-합동분향소 앞
-집에 혼자 있기를 어려워하는 학부모들이 머묾

경기도 미술관

-합동분향소에서 걸어서 5분 거리
-희생학생 학부모 대책위 분과위 사무실
-매일 아침 10시 유가족 회의 열림

단원고

-2학년 학생 250명이 희생된 뒤 교실 텅 빔
-생존학생 교실은 건물 반대편 특별실에 새로 마련
-2층에 생존학생 학부모 대책위 사무실
-아이들이 수업에 잘 집중하지 못하고 있음

옷사랑 세탁소

-유리 쪽문이 달린 작은 세탁소 겸 편의점
-희생 학생 전현탁 군 어머니가 운영했음
-응원 메시지들은 사라지고 문을 닫은 상태

안산문화광장

-안산시청 앞에 조성된 시민 광장
-추모 예술품과 편지로 가득함
-추모 공연과 안산 시민 촛불행사가 열림

희생교사 최혜정 선생님의 집

-단원고에서 3㎞ 떨어짐
-최 교사는 부임 2년 만에 참사를 당했음
-최 교사 부친은 유족과 함께 서명운동
준혁이네

매일 오전 7시 정각이면 어머니가 차린 아침상에 준혁이, 누나와 함께 둘러앉았다. 수더분한 성격인 준혁이는 기자에게 누나 방을 내줘도 괜찮다고 했지만, 첫날은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준혁이는 세월호가 물에 잠긴 뒤 잠수를 해 헤엄쳐 바다로 탈출했다. ‘배’를 탔던(생존 학생들은 세월호를 ‘배’라고 불렀다) 같은 반 친구들 36명 중에서 살아 돌아온 것은 준혁이를 포함해 9명뿐이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어머니가 출근하고 준혁이가 등교한 뒤, 기자는 누나와 아버지와 함께 생존학생 학부모 대책위원회 사무실이 있는 단원고로 갔다. 일용직에 종사하던 아버지는 다른 생존 학생 아버지 17명처럼 휴직을 했다. 대학교 3학년이던 누나는 휴학하고 대책위원회에서 컴퓨터 작업을 맡았다.

아버지는 담배가 늘었다. 차 뒷 유리창엔 노란 리본 스티커가 붙었다. 단원고 2학년 학생 아버지들의 차에는 ‘진상규명’ 스티커가 붙어 있거나 아이들이 친구와 찍은 사진이 운전석 앞에 달려 있었다. 평생 해본 적 없던 집회와 서명 운동, 국회 농성을 다니느라 준혁이 아버지의 얼굴은 새카맣게 타 있었다. 학부모 대부분은 ‘단기 기억 상실’ 증상을 겪었다. 차를 타고 한참을 가다가 문득 “내가 언제 여기까지 왔지”라며 멈춰 섰다. 생존학생 학부모 대표를 맡고 있는 장동원 씨는 9일 오후 한참동안 변호사와 통화를 한 뒤 끊자마자 “내가 방금 누구랑 통화했지?”라고 혼잣말을 했다.

준혁이보다 5살 많은 누나의 책장에는 사고 이후 준혁이와 함께 찍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도 준혁이였다. 누나는 단원고에 갔다가 준혁이가 수업을 마치면 같이 집에 걸어왔다. 온 식구가 ‘퇴근’한 저녁이면 누나와 어머니는 소파에 앉아 학부모 단체 카톡을 하나하나 짚고 읽곤 했다. 엄마 아빠들은 카톡방에서 밤늦게까지 아이들 얘기를 하며 위로도 걱정도 함께 나눴다.

기말고사가 한 주 뒤로 다가왔지만 준혁이는 공부가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어머니가 걱정했지만 준혁이를 비롯해 아이들은 수업에 예전처럼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준혁이는 “반 친구들 거의 수업을 아무도 안 들어요. 서너 명만 듣고, 나머지는 엎드려 있거나 폰 만지고 있거나 해요”라고 말했다. 집에 오면 컴퓨터 게임으로 시간을 보냈다. 취미이자 특기였던 배드민턴도 한동안 치러 나가지 못했다. 단원고 배드민턴 동아리 소속이었던 준혁이는 적금을 모아 얼마 전 새 배드민턴 채를 샀지만 함께 배드민턴을 치던 친구는 배에서 나오지 못했다. “(20여명의 배드민턴 동아리 멤버 가운데) 아무도 없어요(안 남았어요). 아, 한 명… 저 말고 한 명 있어요”라고 준혁이는 말했다.▲ TOP

단원고



오전 8시 아이들의 등교가 끝나면 오전 9시 학부모들의 등교가 시작됐다. 생존 학생 학부모들은 여전히 불이 켜진 예전 빈 교실 옆 사무실에서 매일 아침 회의를 했다.

단원고 3층엔 2학년 1반부터 6반, 2층엔 2학년 7반부터 10반의 교실이 있었다. 원래 교실엔 책상과 사물함이 그대로 있었다. 평상시처럼 아이들이 등교할 시간이면 불이 켜졌고 종례 시간이 지나면 꺼졌다. 하지만 교실엔 아무도 없었다. 희생 학생들의 책상 위엔 비닐로 포장된 국화꽃이 한 송이씩 놓여 있었고 칠판과 문에는 남겨진 이들의 메시지만 가득했다. 빈 책상에 “삼촌 된 것 축하한다. -사랑하는 형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 사이 조카가 생겼다는 형의 ‘신고’였다. 매일 오후 2시가 되면 생존학생 학부모들은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빈 책상을 쓸고 닦았다.



단원고 건물은 ‘ㄱ’자 형태였다. 생존 학생 75명의 교실은 같은 층 다른 쪽 복도에 있는 미술실, 컴퓨터실 등 특별실에 새로 마련됐다. 11반부터 18반까지, 한 반에 10명 안팎이었다. 원래의 교실과, 새 교실이 있는 복도를 양쪽으로 두고 가운데에 생존학생 학부모 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어머니 아버지는 이곳에서 매일 오전 9시 회의를 열고 살아남은 아이들을 돌볼 방안과 세월호 진상 규명 대책을 논의했다. 아이들의 방과 후 활동 지원을 오랫동안 요청했지만, 학교도 교육청도 “논의 중”이라고만 했다. 학부모들은 지역 교육 봉사 단체와 체육관에 도움을 청하고 아이들에게 직접 방과 후 특별활동 신청을 받았다. 부모들은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곧잘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엄마 아빠가 있는지 확인했다. 여학생 하나가 문을 빼꼼히 열고 “저희 엄마 여기 있어요?”라고 물으면 어머니가 “그래 내 새끼”라고 했다. 아무 일이 없는데도 아이들은 사무실 안 냉장고 핑계를 대며, 엄마 아빠 얼굴을 보러,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문을 두드렸다.

가끔 아이들은 반대쪽 복도에 있는 원래 교실에 가서 예전 자기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기도 했다. 멍하니 있거나 엎드려서 책상 위에 뭔가를 끄적이곤 했다.

11일에는 단원고 학생회장 선거가 있었다. 2학년 후보로 나온 한 학생의 포스터에는 “모두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여느 학생회 선거처럼 축제에 연예인을 부른다거나 하는 공약은 없었다. 배에서 살아나온 아이들은 훌쩍 자라버린 듯했다. ▲ TOP

명성교회

명성교회 2학년 희생학생 양온유 양은 부모와 세 동생과 함께 명성교회 뒤편에 딸린 집에 살았다. 온유는 4월 16일 세월호 갑판 위에 있다가 친구들을 구하러 선실로 돌아간 뒤 돌아오지 못했다. 온유의 아버지는 이 교회의 관리직을 맡고 있었다. 매일 저녁 8시면 이곳에선 세월호 참사 피해자를 위해 예배가 열렸다.



참사 이후에도 온유네는 여전히 이곳에 살았다. 부모는 어린 딸을 고생만 시키다 보낸 것이 미안해 그저 죄인 같았다. 아버지는 다른 유가족들과 합동분향소 앞 천막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남겨진 딸의 책상을 쓸어 보던 아버지는 “부모 걱정 한 번도 끼치지 않았던, 의젓하고 믿음직한 그런 애였는데…”라며 고개를 떨궜다.집안에만 있던 어머니는 이제 낮이면 가끔 집 밖을 나와 다니기도 하고 이웃들과 이야기도 조금씩 시작했다. 어머니는 이웃 분식집 아주머니와 앉아 있다가 눈물이 나면 거울을 보는 척하면서 “아 눈이 왜이래…”라고 하곤 했다. 그러면 분식집 아주머니는 모른 척 일손을 다시 움직인다고 했다. ▲ TOP

옷사랑 세탁소

‘옷사랑 세탁소’는 희생 학생 전현탁 군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작은 세탁소 겸 편의점이었다.

문 앞에 있던 꽃다발과 노란 리본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누군가가 갖다 두었던 응원의 편지도 비를 맞다가 언젠가 없어졌다.

‘현탁아 돌아와’라고 쓰여 있던 글귀도 사라졌다. 연락처만 메모지에 남긴 채 세탁소는 내내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현탁이가 끝내 희생된 것으로 드러난 뒤 어머니는 세탁소 안 쪽방에 누워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웃 분식집 사장은 “가끔 불이 켜질 때도 있었지만, 문을 연다고 해도 아직은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것”이라며 걱정을 했다. ▲ TOP

놀러와 분식

“준혁아, 분식집 아주머니가 너 토스트 먹으러 오래.” 아침을 먹던 준혁이가 기자의 말에 살짝 웃었다. 함께 지낸 지 이틀째,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놀러와 분식’은 단원고 앞에서 6년째 영업 중이다. 학교 인근에서는 가장 오래된 분식점이다. 이 곳을 운영하는 부부는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중학교를 다니던 때부터 토스트, 김밥, 떡볶이를 팔아왔다.

오후 4시 반, 수업을 마친 아이들은 여전히 분식점을 찾아왔다. 부부는 2학년 명찰을 단 아이가 오면 토스트 값을 받지 않았다. 가게에는 희생된 3반 신승희 양이 참사 이전에 백일장에서 썼던 ‘항해’라는 제목의 시가 남겨져 있었다. “우리는 잔잔한 바다를 영원히 함께 항해하리…”라는 시구가 이젠 칼날처럼 남겨진 이들의 가슴을 후벼 팠다. 누군가 손 글씨로 다시 써서 단원고 앞 골목에 걸어두었던 시였다. 부부는 비를 맞고 귀퉁이가 찢어진 종이를 코팅해 가게 안에 간직했다.

4월 16일 전에는 점심 급식 메뉴가 별로인 날이면 가게는 학생들로 꽉 찼었다. 소풍이나 행사가 있는 날이면 부부는 새벽부터 나와서 아이들 김밥을 말았다. 방과 후에 선생님이 간식이라도 사는 날이면 교실까지 와플 수십 개를 배달했다. “수학여행 가던 날도 와서 떡볶이 시켜 먹고 떠들던 애들인데…” 주인 아주머니는 말을 삼켰다. 사장님은 “사고 전에 최혜정 선생님이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버스 놓칠까 종종걸음으로 가는 걸 봤어요.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으면 내가 집에 태워다 줬을 텐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참사 이후 아이들의 빈자리엔 다른 손님들이 찾아왔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단원고 앞에 노란 리본을 매달고는 분식점에 들러 요기를 했다. 어느 날은 대구에서 새벽에 와서 점심을 먹고 내려간다는 고등학생 남매가 라면을 시켰다. 또 어느 날은 못 보던 중년 부부가 구석에 앉아서 쫄면을 먹었다. 희생된 최혜정 교사의 부모였던 부부는 묵묵히 식사를 마친 뒤 나가면서 “우리 혜정이 집에 잘 들어왔어요. 걱정 마세요,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주인 아주머니는 “저희는 애들 이름은 다 몰랐지만 얼굴을 다 알잖아요. 합동분향소에 가면 걔들 이름을 다 알게 되는데… (마음이 아파서) 갈 수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 TOP

희생교사 최혜정 선생님의 집

희생자 최혜정 선생님의 아버지는 14일 안산 트라우마 센터에서 진단서를 받아오는 길에 분식점에 들렀다. “나는 최혜정이 아빠에요.” 땀범벅이 된 기자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냉커피를 시켜줬다.

최혜정 선생님의 집은 단원고에서 3㎞ 떨어진 동네에 있었다. 아버지는 딸의 방을 아직까지 다 치우지 못했다. 침대에는 딸이 쓰던 이불과 베개가 그대로 깨끗하게 펼쳐져 있었지만 방바닥에는 싸다 만 짐 가방 서너 개가 널려 있었다. 거실 텔레비전 밑에는 딸의 사진이, 벽에는 학창시절 받았던 학업우수 상패가 걸려 있었다. “얼마나 꼼꼼하고 쾌활한 애였는데…” 아버지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부임 2년 만에 참사를 당한 최 교사에게 남은 제자는 1학년 때 맡았던 아이들 8명과 2학년 9반 아이들 2명, 총 10명뿐이었다. 딸은 초임 교사의 열정이 넘쳤다. 방과 후 수업을 하고도 거의 매일 밤늦게까지 아이들이나 학부모와 상담을 하고 오곤 했다. 방에 남겨진 교무 수첩에는 반 아이들 별로 특별히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인지, 챙겨줘야 할 부분들은 무엇인지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희생된 9반 아이들의 학부모와 함께 아들딸 대신 까만색 9반 반티를 입었다. 티셔츠 등 쪽에 흰색으로 ‘9’자가 새겨지고 그 위에 까만 글씨로 ‘최혜정 선생님’과 아이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다른 유가족들과 함께, 아버지는 반티를 입고 전국 순회 버스를 타며 특별법 제정 서명운동을 하고 국회 농성을 나갔다.

얼마 전 딸의 제자 10명을 모아 밥을 사 먹였다고 했다. 딸은 늦게까지 남은 아이들을 모아 분식점에서 와플을 사먹이곤 했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하고 큰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요즘 수업을 거의 안 듣는다는데… 걱정이에요. 내가 가서 잔소리라도 해주고 싶어요”라며 아버지는 쓸쓸히 웃었다. ▲ TOP

고잔동 파출소

“순찰하다가 학교 앞 정자에 앉아 있으면 ‘아저씨, 아저씨’ 하던 애들이 싹 사라졌으니까… 요새도 거기 앉아 있으면 이걸 믿을 수가 없어”

등하교 시간이면 단원고 앞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순찰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고잔파출소 직원들은 6월 말까지 24시간 순찰 체제였다. 최근 오전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로 거리 도보 순찰 시간이 짧아졌다.

참사 이후 얼마간 동네는 울분에 싸여 있었다. 밤이면 아들딸을 잃은 아버지들이 술에 취해 이성을 잃고 싸움이 일어났다. 손녀를 잃은 할머니가 울면서 대낮에 학교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친구를 잃은 남학생이 밤에 학교 앞에서 알 수 없는 소리를 오래도록 지르기도 했지만 아무도 나와서 말리지 않았다. 수많은 신고에 파출소는 쉴 틈이 없었다. 아이들을 찾으러 부모들이 모두 진도로 내려갔을 때 직원들은 텅 빈 집들을 찾아다니며 문에 붙은 전단지를 떼고 쌓인 우편물들을 거두어 지키며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네는 점차 안정을 찾아갔지만 파출소는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상시 순찰 인력 13명에 순찰차 5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두 명씩 짝지어 순찰을 도는 직원들이 익숙한 지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파출소장은 단원고 생존 학생들이 등교하던 날 학교 앞까지 찾아갔다고 했다. 이름도 모르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동네가 작으니까 애들이 ‘아저씨, 아저씨’하며 얼굴을 다 알아요… 이 동네 아무도 이게 시간이 지나면 슬프지 않을 거라고,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들 그냥 익숙해지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거죠.” ▲ TOP



합동분향소 : 안산 화랑유원지 안 정부 공식 합동분향소. 일요일인 6일 기준 900명이 방문하는 등 휴일 방문객들이 꾸준히 찾고 있다.





경기도 미술관 : 희생학생 학부모들의 분과 위원회 사무실이 마련된 곳. 매일 아침 10시에 유가족 회의가 열린다.

유가족 천막 : 합동분향소 앞 유가족 천막. 휴직했거나 집에 혼자 있기를 어려워하는 학부모들이 머물고 있다.

고잔1동 주민센터 : 6월까지 유가족들에게 반찬과 도시락 등을 배달했다. 안산시에서 오는 생필품과 식자재를 직원들이 직접 유가족 집으로 나르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하늘공원 : 아이들의 납골당. 2학년 희생 학생들의 위패와 아이들에게 보내온 편지, 선물이 쌓여 있는 곳이다.





꽃빛공원 : 학부모들은 안산 곳곳의 납골당에 흩어져 있는 아이들의 위패를 모아 이곳에 ‘추모 공원’을 만들 것을 논의 중이다.

전출가구 1 : 희생학생 박모 양이 살던 집. 박 양이 숨진 뒤 부모님과 오빠는 와동 주민센터의 도움을 받아 상록구로 이사했다.

전출가구 2 : 희생학생 김모 양은 이곳 반지하방에서 어머니와 살았다. 김 양이 숨지고 나서 어머니는 고잔1동 주민센터의 도움을 받아 상록구로 이사했다.

안산문화광장 : 안산시청 앞 시민 광장. 많은 시인, 화가 등 예술가들이 남긴 작품과 시민들이 남긴 편지, 노란 리본이 광장 전체를 메우고 있다. ▲ TOP

“○○야 미안해. 나만 살아 돌아와서.” 안산 단원고 2학년 A양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는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전 7명의 급우들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올라 있다. 하지만 이 사진 속 주인공들 중 A양만 살아남았다. 지난달 25일 세월호 사고 이후 처음으로 등교한 생존학생들은 거짓말처럼 휑하게 비어버린 교실과 조화가 올려져 있는 급우들의 책상을 바라보며 무거운 납덩이가 마음 한 구석을 짓누르는 느낌을 받았다. 이날 자신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며 학생들은 그동안의 눈물을 한꺼번에 터뜨렸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어느덧 100일이 가까워진다. 유가족 못지않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끼고 있는 생존 학생들의 현재 심리 상태 및 치료 과정 일부를 본보가 들여다봤다.


현재 생존 학생들이 느끼는 감정의 많은 부분을 ‘죄책감’과 ‘무기력증’이 차지하고 있다. 학생들이 안산중소기업연수원 합숙 기간 중 그린 그림을 보면 이런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본보는 생존학생 학부모 대책위원회의 동의를 얻어 학생들이 그린 그림 78점을 입수했다.


생존 학생들이 그린 그림을 분석한 차의과대 미술치료대학원 김선현 원장(46·사진)은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S)
치료 전문가이다.
김 원장은 현재 위안부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한 미술심리치료 활동을 7년 동안 해오고 있으며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주민들 및 성폭력 피해 여성들에 대한 미술심리치료활동도 진행했다.


한 학생이 그린 그림을 보면 도화지 아래는 파란색으로 파도가 그려져 있고 세월호 선미가 물결 위로 약간 드러나 있다. 왼쪽에는 희망과 기적을 상징하는 노란리본이, 오른쪽에는 꽃잎이 떨어지고 있는 흰 국화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림 가장 위쪽에는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 날짜 4월16일이 적혀 있다.


미술심리치료 전문가인 김선현 차의과대 미술치료대학원장은 “국화 꽃잎이 바다로 떨어지고 있는 것은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함께 학생 자신의 우울감이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노란 리본은 같은 반 학우에 대한 그리움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원장은 “사고 날짜를 적은 것은 ‘마음속에 새기고 잊지 않겠다’라는 다짐을 표현한 것으로 희생자에 대한 애도 및 외상 사건에 대한 충격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학생은 그림 대신 글로 “사랑한다 ○○○, 끝까지 친구들 신경 쓴 너는 정말 최고였어, 세상이 망해가는 기분이 들어, 거기서 기다려 … 너희 몫까지 살다갈게 나만 나와서, 그날 그저 미안해”라고 자책감을 표현했다. 이은경 명지대 청소년지도학과 교수는 “마음 속에서 죽은 친구에 대한 죄책감이 남아있어 현재 혼란스러운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자신의 죄책감을 씻기 위해 과도한 행동이나 정서를 보일 경우 폭식, 불면 등의 부적응 행동도 나타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생존학생 학부모 대책위원회에서 75명의 생존학생들을 대상으로 7~13일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조사 결과 ‘지난 일주일동안 느낀 감정’을 묻는 질문에 ‘지쳐 있어요’와 ‘지루해요’가 각각 33명(복수응답)으로 가장 많았다. ‘복잡해요(28명)’ ‘마음아파요(25명)’ ‘불만스러워요(24명)’ ‘지긋지긋해요(23명)’ ‘슬퍼요(21)’ 등 부정적인 응답이 대부분이었다.


생존 학생들의 최근 일주일 동안 기분을 나타낸 워드클라우드!

  • 생존 학생들의 최근 일주일 동안 기분을 나타낸 워드클라우드!
  • 생존 학생들의 최근 일주일 동안 기분을 나타낸 워드클라우드!


    생존학생 학부모 대책위원회에서 7월 7일~13일 사이 단원고 생존학생 75명에게 ‘지난 일주일 동안 느낀 감정’을 물어본 결과를 토대로 만든 워드 클라우드.
    워드 클라우드에서는 답변 빈도가 높은 단어일수록 더 크게 표시된다. ‘지쳐있어요’, ‘지루해요’ ‘마음 아파요’ 등 부정적인 답변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행복해요’ ‘장난치고 싶어요’ 등 일부 학생들의 장난스런 답변도 있었다.

‘한달 전부터 느낀 감정’에 대해 묻자 ‘불안하거나 우울할 때가 있다’는 학생이 71%, ‘무슨 일을 하더라도 집중하기 어렵다’는 학생이 49%를 차지했다.


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학생들은 자신들이 경험했던 충격적 사건이 사회적으로 어떻게든 마무리되고 그 사건이 과거의 것이라 생각돼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며 “자신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친구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당시의 충격과 무기력감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2000년 부일외고 수학여행 참사의 생존자 김은진 씨도 “생존 학생들은 사고를 책망할 원인을 찾다 결국에는 본인에게 돌릴 수 있다”며 생존 학생 치유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생존 학생들의 심리치료를 진행했던 비영리 교육단체 ‘아름다운 배움’은 ‘대학생 멘토’라는 방법을 통해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아름다운 배움은 경기도 교육청의 요청으로 4월 30일부터 7월 4일까지 3차례에 걸쳐 멘토링 교육을 실시했다. 이 프로그램은 ‘단원고 생존학생 치유 및 가정, 학교 복귀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다.


5월 5일부터 대학생 멘토로 심리치료 과정에 참가한 B씨는 처음 본 생존 학생들의 가슴 아픈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다. 당시 사고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학생들은 “친구들에게 죄책감이 느껴져요”, “삶이 무기력해요”란 말을 했다. 하지만 멘토링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교사 및 전문 상담사 등에게는 심리적으로 위축돼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지 못하던 학생들이 형, 누나뻘 되는 멘토들과 친해진 뒤로는 움츠렸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 B씨는 “처음에는 말도 걸지 않던 학생들이 한 달 정도 지나자 멘토 선생님들에게 먼저 연락을 하기도 했고 부모님 및 친구들의 이야기도 꺼낼 정도로 밝아졌다”고 전했다.


아름다운 배움은 세월호 사고로 숨진 학생들의 형제, 자매에게까지 ‘멘토링’프로그램을 확대할 방침이다. 백연상 기자 baek@donga.com ▲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