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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버의 한국 블로그]뜨끈한 육개장에 녹아든 한국인의 情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입력 2018-04-24 03:00수정 2018-04-24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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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몇 주 전 회사에서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다. 엄마한테 온 전화였다. 한국과 영국의 9시간 시차 때문에 엄마로부터 오는 전화는 주로 주말에만 온다. 평일 업무 시간에 온 전화는 받지 않아도 안 좋은 일이라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여러 생각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영국에서 유학하는 아들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아니면 아버지가 어디 편찮으신 것은 아닌지. 전화를 받아보니 연세가 아흔다섯이신 외할아버지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셔서 입원하셨다고 했다. 예후가 좋지 않으니 마음의 준비도 하라는 말과 함께.

그날부터 영국의 모든 친척들이 마지막 인사를 하러 병문안을 갔다. 나는 가지 못했다. 하루에 두 번 정도 엄마한테 문자만 받았다. “오늘은 기운이 없으시고 거의 잠만 주무셨다.” “아침식사 많이 드시고 팔팔해 보이신다.” 그러다가 6일이 지났는데 또 업무시간에 전화기가 울렸다. 엄마의 영상통화였다. 비 오듯 눈물을 흘리는 엄마의 얼굴을 겨우 봤다. 훌쩍거리시며 외할아버지께서 별세하셨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조부모 4명 중에서 3명의 별세 통보를 받았다. 1996년 봄 중국에서 유학할 때 방학이라 지방 여행을 잠깐 갔다. 기숙사에 도착해 보니 전보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별세하셨다는 비보를 읽고 나는 그저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 1997년에는 여름방학 때 연구를 하러 또 해외에 가 있었다. 귀국한 날 시차 때문에 지친 몸으로 비몽사몽 할아버지께 잘 다녀왔다고 짧은 통화를 겨우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간밤에 별세하셨다. 그리고 한국에 있던 2015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외할머니께서도 별세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나로서는 매번 혼자 비탄에 빠져 있어야 했다. 위로를 잘 받지도 못했다. 부모님께 위로의 말만 건네드릴 수 있었다. 장례식에도 가지 못했다. 내가 다녔던 직장에서는 모두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쓸 수 있는 특별휴가가 있었지만 사실상 내가 쓰지 않았다. 사망 날짜부터 써야 하니 유연성이 없다. 영국에서는 보통 장례식이 몇 주 뒤에 열리니까 쉬더라도 한국의 특별 경조사 휴가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또 제출해야 할 증빙자료 같은 경우 한국인은 동사무소에서 쉽게 뗄 수 있지만 외국인은 해외에서 자료를 가져가도 인정 여부는 회사의 판단에 따라 다르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영국에서 가본 장례식장이라고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이 전부였다. 대신에 한국에서는 상갓집에 갈 일이 제법 많았다. 처음에는 많이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회사에서 얼굴을 살짝 아는 정도의 직장 상사의 한 번도 뵙지 못한 연세 드신 친척분이 돌아가신 자리에 내가 왜 굳이 가야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것도 먼 지방까지 가서 내 기준으로는 적지 않은 부의금을 내면서 말이다. 영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까운 친지들과 친구들만이 올 뿐이다. 이제는 어느 정도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갈 때마다 여전히 어색하다. 절을 몇 번이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도 받지 못하고 쭈뼛쭈뼛 다른 분을 따라 하는 정도일 뿐이니 아마 존경과 애도를 표현하는 자세라기보다는 조금 무식해 보였을 것 같다. 애도를 표할 때도 한국어 교재에서는 이런 내용을 쉽게 찾지 못하니 예의 바른 표현과 알맞은 격식을 썼을 리 만무하다.

한국에 오래 살다 보니 한국에서 살아 온 다른 외국분의 장례식장에 갈 일도 생기곤 한다. 한국에서 치러지는 외국 사람의 장례식 모습은 조금은 특별했다. 우선 조문객이 원하면 고인과의 작별인사를 할 수 있었다. 영국이나 다른 서양권에서는 보통 있는 일이다. 그리고 식사의 경우 육개장과 밥이 있는 한식과 양식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아무래도 한국에 오래 계셨던 분이어서 외국 지인들 외에도 여러 한국인들까지 배려한 가족의 따뜻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한국과 영국, 비록 두 나라의 장례식 문화의 형식은 조금 다를지언정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아파하고 나누는 사람들의 마음은 동일하다.

오늘 한국 시간으로 오후 10시는 우리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이 시작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디지털 세상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장례식을 스트리밍하는 것은 천박한 일인 것 같다. 난 그래서 집에서 조용히 혼자 앉아 어렸을 때부터 차곡차곡 쌓아 온 외할아버지와의 추억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것 같다. 영국에 가지 못해서 아쉬움이 크지만 글로벌 시민의 저주라고 여길 수밖에.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장례식장#한국 장례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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