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장애인의 세세한 개별적 요구에 부응하는 맞춤형 특수교육과, 장애인 개인의 장애정도에 걸맞은 맞춤형 복지를 기반으로 장애인들도 끼와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장애인 문화예술이 꽃을 피워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날이 가까워질 것으로 보입니다.
A. 서울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에 입학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시각장애인들에게는 난공불락처럼 여겨졌던 서울대학교에 시각장애인 최초로 입학을 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벅찬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A. 18세의 나이에 완전히 실명을 하여 맹학교에 입학한 것입니다. 이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맹학교에 입학하여 전맹 시각장애인이 공부도 할 수 있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시간을 아껴서 배워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 후회없이 공부했던 시절이었습니다.
A. 초중고 시절에 남들만큼 볼 수 없어 약시 내지는 야맹증으로 살아야 했는데 나 하나로도 모자라 동생까지 같은 증상을 보여 두 형제가 나란히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유전에 대한 우려 때문에 형제가 같이 앞으로 결혼도 하지 말고 평생을 살자고 결심했던 가슴아픈 시련의 순간을 보냈습니다. 전맹 시각장애인도 공부를 할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우리 형제의 삶에 큰 변화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A. 인생은 결코 길지 않습니다. 한 순간 한 순간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과감한 도전을 통해 주어진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결코 실패를 두려워 하지 마세요
A. 80점 정도. 항상 바깥 일로 바쁘고 일이 많아 가족들과, 특히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도 아쉽습니다.
A.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하늘이 감동하여 아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절대 공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A. 스무살 나이, 앞을 볼 수 있는 삶을 살게 된다면 운동을 좋아하고 스포츠에 관심이 많아 스포츠 기자나 스포츠평론가가 되고 싶습니다.
A. 여덟살 무렵 그 땐 그래도 눈이 조금 보여 아버지, 어머니, 동생 손을 잡고 나들이도 자주 했던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되는 순간부터 너무 치열하게 살아서 삶의 소소한 행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