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전쟁史]<16>전쟁을 글로 배운 서생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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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9년 7월 11일 전함 200여 척과 병사 1만7285명이 거제도에서 출항했다. 목적지는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對馬)섬이었다. 왜구가 모두 쓰시마섬에 사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 섬과 해안 지역에 흩어져 살던 왜구들이 조선으로 건너오려면 쓰시마섬에 모였다. 최적의 중간 집결지였다. 쓰시마섬의 도주는 왜구에게 통과세도 받고 교역도 했다. 그들을 우대했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부터 왜구 문제로 고통을 받았다. 수군을 육성하고 강력하게 반격하면서 상당한 전과를 거뒀지만 왜구의 기세는 그치지 않았다.

상왕이던 태종은 ‘언제까지나 당하기만 할 것이냐’며 쓰시마섬 공격을 지시했다. 조선 함대가 나타나자 쓰시마섬 주민은 질겁했다. 그들은 집과 마을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쳤다. 조선은 손쉽게 항구를 점령했고 마을과 배를 불태웠다. 현대적 기준에서 보면 적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는 초토화 작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기 전쟁에서는 당연한 전술로 간주됐다.

작전은 성공적이었지만 누군가 이런 의견을 냈다. “우리는 빈 마을만 소탕하고 있다. 적은 산속에 숨었는데, 그들을 공격하지 않으면 전투를 회피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까?” 이렇게 시작한 공격은 대실패로 끝났다. 참사까지는 아니었지만 좁은 산곡에서 조선군은 기습을 당했고 패주했다. 필자는 현지에 가봤는데,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승리할 수 없는 지형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이 현지 지휘관만의 책임이었을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문자로만 전쟁을 배운 서생들의 비난을 곧잘 볼 수 있다. 그 덕에 공을 세운 무장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고 현장에서는 소신껏 지휘하지 못했다. 소신껏 지휘를 한 사람은 굴욕을 겪는다. 쓰시마섬을 정벌한 무신 이종무도 귀국한 뒤 바로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혀 유배됐다가 죽었다. 민주사회에서 여론은 중요하지만 여론도 자신의 영역과 역할이 있다. 감정적인 여론이 전문가를 이기고, 비전문가가 전문가로 행세하는 사회는 올바른 길로 갈 수 없다. 쓰시마섬에서 전사한 병사들은 지휘관을 원망했을까, 아니면 지휘관을 그렇게 만든 세상을 더 원망했을까.
 
임용한 역사학자

#쓰시마섬#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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