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의 갯마을 탐구]〈7〉호미 들고 왜 갯바위에 갔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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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시원한 해풍과 방해받지 않고 쏟아지는 햇살. 바닷가는 낭만적이다. 온갖 생명의 안식처인 바다는 푸근하다. 하지만 여기도 삶은 치열하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던 동해안의 한적한 어촌. 40여 명이 모인 마을회관엔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선박 주인과 해녀 사이의 4번째 회의가 시작됐다. 해녀들이 합세해 공격했다. 당황한 선주들은 제대로 반격도 못 하고 집단 퇴장. 안주와 컵도 없이 병 소주를 돌려가며 마시는 선주 10여 명은 모두 백발노인이다.

한편 할머니 해녀 20여 명은 미동도 없다. 결국 4차 마을 회의도 결렬. 다음 날 선주들이 해녀들에게 백기투항하며 노인들의 전투는 일단락되었다. 바다 위에서 그물을 끌며 살아온 뱃사나이와 물밑에서 숨을 참으며 해산물을 채취하던 해녀들. 바다에서 한평생을 살아온 백전노장들의 한판 승부는 그렇게 끝났다.

싸움의 시작은 이랬다. 선주들은 해녀와 해산물을 실어 나르는 운반선의 대여료 인상을 요구했고, 해녀들은 난색을 표했다. 선주 측에서 작업선을 일제히 철수하겠다며 벼랑 끝 전술을 썼다. 이에 질세라 해녀들은 앞으로 이웃마을 운반선만 이용하겠다며 맞섰다. 결국 선주들의 벼랑 끝 전술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겨울이 찾아왔다. 이전의 치열한 공방 대신 삶의 터전을 가꾸기 위한 더 치열한 협력이 시작됐다. 온 마을 주민들은 한 해 미역 농사의 풍흉을 좌우하는 미역바위 청소를 하느라 분주했다. 바위를 긁어낼 호미 날을 가는 사람들, 해녀들 식사를 준비하는 주민들로 마을은 한 달 내내 시끌벅적했다. 치열했던 전쟁의 잔상은 없었다. 미역바위를 잘 가꿔서 다음 해 돌미역 풍년을 이루겠다는 열망만이 넘쳐났다.

울산 제전마을 해녀는 입동을 전후로 바닷물에 잠겨 있는 갯바위를 호미로 긁어낸다. 50∼60명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바위에 붙어 있는 패류(貝類)나 잡조류(雜藻類)를 없애는 작업이다. 미역바위 김매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바위를 긁어내면 포자가 잘 안착돼 미역이 촘촘하게 성장한다. 잎이 적고 줄기 위주로 자라는 고가의 미역이 된다. 이를 지역에 따라 기세작업, 돌메기, 개닦이, 바당풀캐기 등으로 부른다. 남·서해안도 미역바위 청소 작업을 하지만 여기처럼 매년 1억 원 이상을 지출하며 대대적으로 기세작업을 하는 곳은 많지 않다. 이렇게 생산된 울산 돌미역은 최고가다. “미역 점포가 제일 많은 대구 서문시장 가봐. 울산 돌미역 1장에 20만 원 넘게 줘야 사. 돌미역은 1시간을 끓여도 풀어지지 않고, 줄기에서 걸쭉한 진액이 나와서 산모한테 최고야.”

주민들의 돌미역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런데 올해 큰 시련이 닥쳤다. 전국 최고가로 판매되던 돌미역 가격이 폭락했다. 설상가상으로 조용하던 마을에 사건사고가 연이어 발생해 사망자가 줄줄이 나왔다. 주민들은 공포에 떨었고, 밤에는 문을 걸어 잠그고 외출조차 하지 못했다. 주민들은 마을회관에 모여서 해결책을 강구했다. 연이은 사고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고, 모든 주민이 하나가 됐다. 동해의 거친 물살을 헤치고 살던 그 기상이 되살아났다. 머지않아 돌미역 향으로 가득한 어촌으로 돌아올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갯마을#동해안#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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