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동아/11월 16일] 벌거벗은 남녀, 한 밤 추위 속에 파출소에 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15일 16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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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얼어 붙은 낙동강 위를 걷고 있는 새들. 사진 제공 동아일보DB
꽁꽁 얼어 붙은 낙동강 위를 걷고 있는 새들. 사진 제공 동아일보DB

1929년 오늘(11월 16일)자 동아일보 3면에는 사랑을 이루지 못해 남녀가 동반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한 이야기가 실렸다.

“지난 11일 밤 11시경 동래군 사상면 파출소에 벌거벗은 알몸둥이의 남녀 두 명이 들어온 것을 동 파출소에서 취조한 바에 의하면 여자는 부산부 미도리마치(綠町) 2초메(丁目) 23반치(番地) 후쿠오카야(福岡屋)에 있는 창기(娼妓) 마츠카와 하츠(松川ハツ·24)로 동행한 남자와 오래전부터 부부의 약속을 하였으나 황금이 원수로 뜻과 같이 되지 아니함을 비관해 그날 밤 8시경 가게를 떠나 낙동강 깊은 물에 정사(情死)코자 하였으나 첫겨울 찬바람에 추위를 견디지 못해 하려던 정사를 그만두고 그와 같이 파출소로 달려온 것이라더라.”

1929년 11월 16일자 지면
1929년 11월 16일자 지면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기서 정사는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情事’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함께 자살하는 일(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뜻하는 ‘情死’다. 이 여인이 함께 목숨을 끊으려 했던 남성이 누구였는지 이 기사만 보면 알 수 없지만 당시 부산 지역에 일본 이름을 쓰는 창기가 있었다.

미도리마치는 현재 부산시 서구 충무동 2, 3가에 해당하는 지역. 충무동 2, 3가라면 어디인지 감이 오지 않아도 개명 전 이름인 ‘완월동’이라고 하면 들어본 분이 적지 않을 터. 부산일보에 따르면 완월동은 1980년대까지 ‘동양에서 가장 큰 사창가’라고 불리던 지역이었다.

미도리마치의 1928년 풍경. 사진 제공 부산시
미도리마치의 1928년 풍경. 사진 제공 부산시


부산에 일본식 유가쿠(遊廓·유곽)가 들어서기 시작한 건 강화도조약에 따라 부산항을 개항한 1876년 이후였다. 개항 후 7년이 지난 1883년 부산에는 유가쿠 9곳에 창기와 유녀(遊女) 94명이 있었다. 이후 계속 곳곳에 유가쿠가 들어서자 1907년 ‘성병과 풍기문란 예방’이라는 명목으로 이들 업소를 한 곳으로 모아 이주시켰다. 그곳이 바로 미도리마치였다. 1927년 부산 지역 신문에 미도리마치에서 일하는 창기를 소개하는 특집 기사가 나올 정도로 당시 유가쿠는 성황을 이뤘다.

여기서 일하던 창기는 대부분 일본 시골에서 부산으로 팔려온 이들이었다. 추정컨대 이렇게 낯선 땅으로 팔려온 여인 중 한 명이 가게를 드나들던 손님과 사랑에 빠진다. 둘은 미래를 약속했지만 “황금이 원수로”라는 구절에서 짐작할 수 있듯 가게 주인은 남성에게 ‘여인을 데려가려면 돈을 내 놓으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그래서 둘은 ‘차라리 같이 죽자’며 강물로 뛰어들었지만 초겨울 강물은 차디차기만 했다.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결국 원수였던 황금을 물리치고 사랑을 이뤘을까? 아니면 우리 사랑은 찬 강물도 이기지 못한다며 서로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났을까?

이 두 사람만 특이했던 건 아니다. 동아일보에는 1935년까지 미도리마치에서 청춘 남녀가 정사에 성공하거나 미수에 그친 사례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들은 함께 목숨을 끊으려고 남의 권총을 빼앗기도, 독약을 마시기도,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기도 했다.

‘스시녀와 김치남’이라는 웹툰을 그리는 고마츠 사야카(小松淸香) 씨는 “성을 쉽게 사고파는 사회일수록 허무한 매춘보다 순수한 사랑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고 했다. 그 시절 미도리마치에서 목숨을 걸고 사랑하던 이들이라면 누구보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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