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김상운]보안사 디스켓과 개인정보 규제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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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운 정치부 기자
김상운 정치부 기자
‘좌익성향 포지자(유포자)로 운동권으로부터는 기회주의자라는 평가.’

‘81년 9월 ○○대 이념서클 ○○에 가입, 의식화.’

‘81년 12월 ○○에서 김○○ 등 6명의 회원이 변증법 스터디 및 토론회.’

1990년 10월 언론에 공개된 국군보안사령부(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의 민간인 사찰 디스켓(총 1303명) 중 현 여권 핵심 인사들을 기술한 문구다. 사찰 대상 개인카드에는 주민등록번호부터 주소, 신장, 체중, 혈액형, 종교, 취미, 가족관계, 전과, 최근 동향에 이르기까지 해당 인물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온갖 정보가 망라돼 있다.

당시 보안사 사찰 대상 중 상당수는 현재 시민단체 및 진보정치 진영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이들이다. ‘빅브러더’ 폐해를 경험한 시민단체가 개인정보 보호에 특히 민감한 역사적 배경이다.

최근 정부 여당은 빅데이터 산업 활성화를 위해 데이터 규제혁신을 추진하고 있다. 컴퓨터로 신용도를 분석해 온라인으로 손쉽게 돈을 빌릴 수 있는 금융 서비스나 고객의 위치정보를 분석해 버스 노선을 정하는 공공 서비스처럼 다양한 빅데이터 산업을 육성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빅데이터 산업을 키우려면 과도한 개인정보 규제부터 완화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4일 국회에서 열린 빅데이터 규제 완화 세미나에서는 중국 인터넷은행들이 빅데이터를 활용해 농어민과 영세상인 2억 명에게 중(中)금리 대출을 제공한 사례가 발표됐다. 이 자리에서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은 “한국은 불과 100여 개도 안 되는 ‘스몰 데이터’를 사용하는 까닭에 효율적인 중금리 대출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빅데이터 사용을 가로막는 개인정보보호법과 정보통신망법, 신용정보보호법을 개정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진보네트워크센터 등 시민단체는 정부의 가명정보(개인정보에서 이름, 주민번호 등 특정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를 삭제한 것) 활용 방침에 반대하고 있다. 가명정보를 재(再)식별하면 개인정보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천표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는 “재식별 조치는 돈과 노력이 많이 들기 때문에 과도하게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반박했다.

정부 여당은 시민단체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개보위)의 권한 강화와 독립기관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방송통신위원회와 금융위원회 등 관련 부처들은 개인정보 보호 업무 이관에 선뜻 합의를 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개보위 권한 강화는 자칫 규제혁신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시민단체 인사들이 개보위에 들어가 개인정보 규제 완화를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보안사 디스켓이 세상에 알려진 지 올해로 29년째다. 작성 주체인 현 기무사는 결국 조직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권위주의 시대처럼 무차별적 개인 사찰은 다시 부활하기 어렵다. 시대가 이처럼 바뀌면 규제도 바뀌어야 한다. 빅브러더 출현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시대 흐름을 반영한 균형적 관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김상운 정치부 기자 sukim@donga.com
#민간인 사찰 디스켓#빅브라더#빅데이터 산업#데이터 규제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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