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광영]‘드루킹’이냐 ‘바둑이’냐, 다시 암호의 계절이 온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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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드루킹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들의 대화에는 정체불명의 암호가 대거 등장한다. ‘서유기’ ‘둘리’ ‘초뽀’ ‘파로스’ ‘솔본아르타’…. ‘드루킹’ 김동원 씨 공범들의 온라인 닉네임이다. 이들이 불렀던 김경수 전 의원의 별명 ‘바둑이’, 댓글 조작 서버 이름 ‘킹크랩’ 같은 말도 자주 오르내린다. 곧 시작될 드루킹 특검 수사를 앞두고 기자들은 이 생경한 단어를 다시 꺼내고 있다.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사건 실체 앞에서 또 씨름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수사가 직업인 사람들은 “수사는 생물”이라고 한다. 범죄는 저마다의 ‘육체’와 ‘정신’으로 이뤄져 있고 수사는 둘 사이에서 살아 움직인다. 범행의 내용이 육체라면 정신은 범행의 동기다. 둘이 맞아떨어질 때 사건 실체가 온전히 드러난다. ‘지난 대선 때 기사 댓글이 불법적으로 조작됐느냐’는 드루킹 사건의 ‘육체’다. ‘정신’이 어떻게 규명되느냐에 따라 사건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진다. 드루킹의 단독 범행이라면 정치 브로커의 일탈이지만 김 전 의원이 묵인 또는 지시했다면 정권 실세의 민심 조작이다.

그동안 경찰 수사가 ‘봐주기’ 논란에 시달렸던 것은 사건의 ‘육체’에 갇혀 ‘정신’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4월 중순 사건이 알려지며 김경수라는 이름이 등장했을 때 수사를 지켜보는 관객의 상당수는 김 전 의원을 사실상 피의자로 보기 시작했다. 김 전 의원과 드루킹이 비밀 메신저로 기사 인터넷접속주소(URL)를 주고받으며 ‘홍보해 달라’ ‘처리하겠다’며 나눈 대화는 의심을 부추겼다.

하지만 수사의 진도는 김 전 의원을 여전히 피해자로 묶어뒀다. 2월 수사 착수의 발단이 된 드루킹의 1월 17일 ‘평창올림픽 남북 단일팀 결성’ 기사 댓글 조작은 청와대에 부정적인 여론을 만들려고 한 범행이었다. 수사 의뢰도 김 전 의원이 속한 더불어민주당이 했다.

김 전 의원이 피의자가 되려면 대선 당시 민주당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댓글이 불법 조작된 사실이 입증돼야 했다. 하지만 드루킹 일당의 봉인된 PC와 휴대전화, 수만 건의 기사 URL에서 조작의 물증을 찾는 건 만만치 않았다. 김 전 의원의 통화 기록과 계좌 압수수색 영장을 받는 데 필요한 범죄 사실의 윤곽이 그만큼 더디게 그려졌다.

경찰이 수사 초기 사이버 사건으로 접근한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온라인 수사는 오프라인 수사와 다르다. 사이버 수사관은 디지털 증거를 찾고 분석하는 데 능하다. 그 대신 범죄자와 신경전을 벌이며 입을 열어본 경험은 많지 않다. 컴퓨터 접속 기록 등 디지털 자료는 부인해도 소용없는 객관적 증거라 범죄자와 부대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드루킹 사건은 ‘온·오프’ 수사 기법이 총동원돼야 하는 ‘게이트급’ 사건이다. 집요하게 현장 증거를 찾아야 하고 관련자들과 여러 차례 결전이 불가피하다. 이런 전투에 강한 지능범죄수사대 같은 인력이 보강된 건 수사 착수 70일 만이었다.

넉 달간 이어진 경찰 수사는 이제 특검으로 넘어간다. 드루킹 일당이 대선 때 불법 프로그램을 이용해 댓글 조작을 했다는 범죄의 ‘육체’는 거의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검이 김 전 의원을 정조준할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험난한 여정이다. 경찰 조사에서 드러난 것은 정황 증거일 뿐 김 전 의원의 연루 가능성을 뒷받침 할 ‘스모킹 건’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2012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디도스’ 해킹사건을 수사한 특검은 “배후를 밝히는 건 신의 영역”이라는 말과 함께 검찰에서 사건을 넘겨받은 뒤 거의 나아가지 못했다. 드루킹 특검은 신의 영역으로 남는 부분이 없기를 빈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드루킹#김경수#경찰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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