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원수]우병우의 ‘자치통감’ 읽기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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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수 정치부 차장
정원수 정치부 차장
이명박 전 대통령의 영장청구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우병우 전 민정수석비서관이었다. 지난해 12월 구속 수감된 그의 근황이 궁금했다. 몇몇 지인들에게 물었더니 “1심 판결을 기대했지만 뜻대로 안 됐다. 지금은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책 제목이 의외였다. 중국 송나라 때 사마광이 쓴 역사책 ‘자치통감’. 송나라 전까지 1362년간의 중국 역사를 294권으로 엮은 이 책은 한글 번역본만 31권이다. 우 전 수석은 이미 1독을 끝내고, 2독째라고 했다.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 일본의 근대화를 열었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애독했다는 ‘제왕의 지침서’다.

왜 이 책을 읽고 있을까. 30년 넘게 이 책을 연구해온 권중달 중앙대 명예교수는 “개혁이라는 것이 겉으로는 참으로 좋고, 시원하게 느껴지지만 급진적인 변화는 실제에 있어서 모두 실패한다는 안타까움이 녹아 있는 책”이라고 한 적이 있다. 사마광이 동시대 왕안석이 주도한 개혁을 비판하기 위해 쓴 책이라는 설명이다. 권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역사는 빨리 가고 싶다고 빨리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급진적 개혁은 웃기는 얘기고, 그건 정치적인 프로파간다”라고 했다.


최근 우 전 수석이 다시 보수로 정권교체가 된 미래를 언급했다는 얘기가 검찰 안팎에서 돌고 있는데, 책 이야기를 접하니 괜한 소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뒤 ‘급진적 개혁을 비판하는 제왕의 지침서’에 빠져 있다는 얘기다. 1심 선고 전 최후 진술 때도 그는 “1년 6개월 동안 저에 대한 표적수사” “과거 제가 검사로서 처리했던 사건에 대한 정치 보복”이라며 사과보다는 현실 부정에 초점을 맞췄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수사 검사로 그는 변호인 문재인 대통령과 조사실에서 같이 있었다. 물불 가리지 않는 수사 실력으로 박연차 게이트의 주임 검사로 발탁됐는데, 하필 수사 대상에 친박계도 있었다. 이로 인해 나중에 검사장 승진이 막혀 옷을 벗었다. 그런데 뒤늦게 입성한 박근혜 청와대에서 그는, 판결문에 따르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비위행위 진상 은폐에 가담해 국정농단 사태를 더욱 심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대통령 참모의, 대통령을 위한 불법이라는 점에서 그와 비슷한 인물이 하나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 때 리처드 닉슨 대통령 특별법률고문이던 찰스 콜슨. 백악관 재임 시절 언론은 그를 ‘대통령의 살인청부업자’로, 정치권은 ‘필요하다면 자동차로 할머니를 치고 지나갈 인물’이라고 평했다. 베트남 전쟁 관련 펜타곤 문서 유출자를 ‘반역 그 자체’로 몰기 위해 수사기관의 문서를 들추고, 정부 경기 회복 정책에 반대하는 관료를 비난하기 위해 허위 사실도 유포했다. 그런 그는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책임자로 지목되자 집을 폭파하겠다는 협박도 받았고, 청문회에 불려가선 의원들에게 주먹으로 맞을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8개월의 수감 생활을 거치면서 그는 달라졌다.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 석방 뒤 이때의 특별한 경험을 ‘거듭나기(Born again)’라는 책으로 엮었다. 콜슨처럼 권력의 정점에서 추락해 구치소에 들어간 한국 정치인들이 종종 이 책을 찾는다고 한다. 이 책에는 콜슨을 바꾼 결정적 조언이 나온다.

“궁극적으로 실패할 것들을 위해서 잠시의 성공을 기뻐하는 자가 되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성공할 것들을 위하여 지금 겪는 잠시의 실패를 감사하라.” 자신의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질주했던, 그래서 사방에 적뿐이었던 우 전 수석이 자치통감 대신 꼭 한번 읽었으면 한다.

정원수 정치부 차장 needjung@donga.com
#이명박 전 대통령#영장청구#박근혜 전 대통령#우병우#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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