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회 기간 외빈접견 이례적… 시진핑 “한국 노력 긍정평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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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미 비핵화 외교전]정의용, 시진핑 등 7시간 연쇄회동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12일 오후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만나자마자 “문재인 대통령이 특별히 (정의용) 특사를 중국으로 파견해 소통하도록 한 것은 중한 관계에 대한 중시를 보여준 것이다. 이를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시 주석은 이날 오후 5시(현지 시간)부터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 푸젠팅(福建廳)에서 35분가량 정 실장과 만나 문 대통령 특사대표단의 방북 및 방미 결과를 전해 듣고 한반도 정세에 대해 논의했다. 시 주석 등 중국 측은 정 실장을 “문 대통령의 특사”라고 표현했다. 시 주석이 첫 발언부터 문 대통령의 정 실장 파견에 감사의 뜻을 나타낸 데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남북, 북-미 대화 국면에서 중국이 배제될 수 있다는 우려가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 양회 중 정 실장 만난 시진핑

시 주석과 정 실장의 면담이 끝난 직후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人民)일보는 시 주석이 정 실장에게 “지성이면 금석도 쪼개진다(精誠所至金石爲開·지성이면 감천, 의지가 굳으면 어떤 일도 이룰 수 있다는 뜻)”는 성어를 언급했다고 보도했다. 시 주석은 이어 “관련국이 모두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안전이라는 근본적인 목표에 집중하기만 하면 한반도는 마침내 두꺼운 얼음이 녹을 것이고(堅氷消融) 꽃이 피는 따뜻한 봄을 맞을 것(春暖花開)”이라는 기대를 나타냈다. 런민일보에 따르면 시 주석은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대화가 순조롭게 열려 한반도 비핵화와 상호 관계 정상화 방면에서 실질적인 진전을 얻기를 기대한다”며 “중국은 한국의 이에 대한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중국의 가장 큰 정치행사로 꼽히는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시 주석이 정 실장을 만난 것은 주목된다. 그동안 중국 최고 지도자들은 국내 정치행사 때 외교 일정을 거의 중단했기 때문이다. 시 주석이 이례적으로 정 실장을 만난 것은 북-미 관계의 급격한 진전으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축소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시 주석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압박에 못 이겨 대북 압박 강도를 높이면서 북-중 관계는 최악인 상태다. 북-중 간 고위급 교류가 끊긴 상황에서 시 주석에 대한 김정은의 메시지를 정 실장이 시 주석에게 전달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런민일보에 따르면 시 주석은 “한국 및 지역 국제사회와 협력하고 중국의 쌍궤병행(비핵화와 평화협정 동시 진행)과 관련국의 유익한 건의를 결합해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 과정을 추진하기를 원한다”는 뜻을 드러냈다. 평화협정은 정전협정 당사국인 중국의 참여가 필요하다. 중국 배제론(차이나 패싱)이 나오는 상황에서 시 주석이 향후 대화 국면에 중국이 참여해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우려를 의식한 듯 정 실장은 “한반도 비핵화 문제 해결은 남북관계 발전으로 이제 막 첫걸음을 뗐다. 여기까지 오는 데 중국의 역할이 매우 컸다. 고맙다”고 말했다. 런민일보는 정 실장이 중국의 역할에 대해 “한국은 마음속 깊이(衷心) 감사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 양제츠 “가장 빨리 와줘 고맙다”

정 실장은 시 주석뿐만 아니라 베이징의 국빈 숙소 및 회의장인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양제츠(楊潔篪) 외교담당 국무위원, 왕이(王毅) 외교부장과 각각 오찬 및 만찬을 함께하고 면담도 별도로 진행했다. 이날 오전 베이징에 도착한 정 실장은 저녁까지 7시간 가까이 숨 돌릴 틈 없는 일정을 소화하며 최고 지도자를 비롯해 중국의 유력 외교 고위 인사들을 만난 것이다. 시 주석에 앞서 정 실장을 만난 양 위원은 “문 대통령이 북한, 미국을 방문했던 정 실장을 가장 빨리(第一時間) 중국에 파견해 관련 사항을 통보하도록 했다”며 감사를 표시했다.

한편 시 주석은 “한중 양측이 정치적 의사소통을 계속 강화하고 전략적 상호신뢰를 공고히 해 민감한 문제를 적절히 처리함으로써 중한 관계의 안정적이고 건전한 발전을 함께 추진해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민감한 문제의 적절한 처리’는 중국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에 대해 한국 측에 요구해온 대목이기도 하다.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이 시점에 다시 사드 문제를 거론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좌석 배치도 도마에 올랐다. 시 주석은 테이블 상석에 앉고 정 실장 일행과 중국 측 배석자들이 마주 보고 앉아 시 주석이 회의를 주재하는 모양새가 됐다. 방중 직전 방북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정 실장이 트럼프 대통령과 나란히 앉았던 것과도 대비된다. 시 주석은 지난해 5월 이해찬 특사 방중 때도 이런 식으로 앉아 외교 결례 논란이 일었다. 이전까지는 중국 최고 지도자가 한국 특사와 나란히 앉았다.

베이징=윤완준 특파원 zeitung@donga.com



※ 精誠所至金石爲開(정성소지 금석위개)


‘정성이 지극하면 쇠와 돌도 열린다’는 뜻. 중국 ‘후한서’에 나오는 말. 중국 서한(西漢·기원전 206년∼기원후 25년)시대 명궁 이광이 호랑이를 만나게 되자 죽을힘을 다해 활을 쏘았는데, 알고 보니 화살이 호랑이 모양의 바위에 깊숙이 박혔다. 다시 활을 아무리 쏘아봐도 바위에 꽂히지 않았다. 양웅(揚雄)이라는 대학자를 찾아가 연유를 물으니 “호랑이에게 죽을 수 있다는 절박함이 자신도 모르게 바위를 꿰뚫는 집중력을 불러온 것”이라며 “정성소지 금석위개”라고 말했다 한다.
#시진핑#정의용#남북대화#북미 정상회담#비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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