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세진]GM이 철수한 호주, 그 이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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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진 논설위원
정세진 논설위원
지난해 10월 호주 남부의 엘리자베스 공장.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 호주 토종 자동차업체 홀덴의 합작사인 GM홀덴이 생산한 빨간색 세단 ‘VF코모도어’가 생산라인을 빠져나왔다. GM홀덴에 남은 근로자 950여 명은 호주에서 생산된 마지막 내연기관 자동차를 환호와 눈물로 맞이했다. 고(高)임금과 낮은 생산성으로 경쟁력이 떨어진 호주 자동차산업의 한 장면이다. 여기까지가 최근 한국GM 철수설로 국내에서 주목받고 있는 호주 자동차산업의 잘 알려진 스토리다.

올해 1월 영국 리버티하우스그룹의 회장인 산지브 굽타는 호주 정부의 지원 아래 GM이 떠난 엘리자베스 공장을 전기차 공장으로 전환하겠다고 나섰다. 영국의 전설적인 자동차 디자이너로 ‘아이스트림’이라는 혁신적인 자동차 생산방식을 고안한 고든 머리까지 가세했다. 철강과 알루미늄, 고부가가치 제조업 분야에서 사업을 하는 굽타 회장은 호주가 전기차 사업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기존 인프라와 인력이 있는 데다 무엇보다 전기차에 필수인 배터리를 만들 수 있는 광물자원이 호주에 풍부하다. ‘이제는 끝났다’고만 생각한 호주 자동차산업이 패러다임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GM이 군산공장 폐쇄를 선언한 이후 한국 정부와 GM본사, 노조는 책임 떠넘기기에 바쁘다. 언제든 한국을 떠날 수 있는 GM이 결국 협상의 칼자루를 쥐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한국이 호주 못지않게 전기차 생산을 위한 장점을 지녔다는 점이 부각되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LG그룹 계열사들은 GM의 차세대 주력 차종인 전기차 ‘볼트’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부품을 공급한다. 전기차의 핵심인 배터리와 전기모터는 물론이고 인포테인먼트(정보와 오락 콘텐츠) 장치 등 전체 부품의 87%가 LG 제품이다. 이미 삼성그룹까지 전기차 배터리와 자동차 전장(電裝) 산업에 뛰어들었다. 2026년부터 연간 100만 대 전기차 판매를 내건 GM이 연구개발(R&D)을 하면서 적재적소에 부품을 공급받을 최적의 입지가 한국일 수 있다.

여기에 평창 올림픽 덕분에 한국은 자율주행의 핵심인 네트워크 분야에서 5세대(5G) 통신망을 세계 최초로 도입할 수 있었다. 정보기술(IT) 인프라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미래차의 양대 축인 친환경과 자율주행을 위한 매력적인 투자처인 것이다.

일자리 감소를 우려하는 정부는 GM 본사가 최소한의 성의만 보여도 당장 지원하고 싶은 게 속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세금을 퍼부어도 몇 년 뒤에 GM의 지원 요구는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당장 GM을 붙잡더라도 프랑스 본사의 글로벌 생산전략에 따라 실적이 좌우되는 르노삼성이나, 친환경 차량 분야의 기술을 축적하지 못한 쌍용차의 대주주인 인도 마힌드라그룹도 언제 한국을 떠난다고 나설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정부가 돈을 주어가며 그들의 옷자락을 붙잡고 “떠나지 말아 달라”며 사정할 수도 없다.

GM을 붙들기 위해 쓸 돈이 있다면 정부는 자동차산업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산업 구조조정의 종잣돈으로 써야 한다. 한국GM의 기존 생산 인프라가 친환경 자율주행을 위한 핵심 허브로 탈바꿈된다면 국내 대기업은 물론이고 해외 기업까지 투자에 나설 수 있다. 결국 이 과정에서 발생할 일시적인 실업이나 갈등을 정부가 정치논리를 벗어나 얼마나 결기 있게 대처하느냐가 관건이다. 이런 청사진과 결단력 없이 GM과 협상에 나선다면 국민 세금은 물론이고 미래의 자동차산업 일자리도 모두 잃을 것이다.
 
정세진 논설위원 mint4a@donga.com
#미국 제너럴모터스#gm#gm 군산공장 폐쇄#산업 구조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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