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김지영]길을 잃을 자유를 만끽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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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남편과 호주 여행을 다녀왔다. 방문했던 도시들도 모두 매력적이었고, 만난 사람들도 하나같이 여유와 유머가 흘러 넘쳤다. 좋았던 것들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지만, 이번 여행이 가장 좋았던 이유를 딱 하나만 꼽으라 한다면 ‘인터넷 프리(Internet Free)’라 하겠다. 무료 인터넷이 아니라 인터넷 없는 환경이다.

김지영 원스토어 이북사업팀 매니저
김지영 원스토어 이북사업팀 매니저
전에는 출국할 때마다 인터넷을 준비했다. 통신사 상품, 유심 등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이 가능한 환경을 구현하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도착 이튿날 남편이 처음 “이번엔 유심 사지 말아볼까?”라고 물어왔을 때 나는 사실 적잖이 당황했다. 아니 그럼 여행정보 검색 애플리케이션은? 지도 앱은?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버텨보다가 정 필요하면 사지 뭐,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으로 나는 ‘인터넷 없이 버티기 놀이’에 동참했다. 귀국하는 날까지 우리는 유심을 사지 않았다.

지도 앱 대신에 종이 지도를 펼쳐 들었다. 여행정보 앱 대신 서로의 감에 기반을 둔 조언에 충실했다. 때때로 이 길이 맞을지, 이 집이 맛이 있을지 내기를 하는 배짱을 부려보기도 하면서 우리는 아날로그가 주는 다소 불편하지만 설레는 즐거움에 젖어 들었다.

처음 여행을 시작하던 시절, 내게 가장 큰 설렘을 안겨준 것은 종이 지도 위의 낯선 거리명들이었다. ‘○○ Street’ ‘○○ Avenue’ ‘○○ Boulevard’ 따위의 입에 붙지 않는 이름들을 애써 되뇌면서 나는 발로 길을 기억했다. 길을 잘못 들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수고로움도 더러 있었지만 뜻하지 않게 선물 같은 풍경이나 식당을 만나기도 했다. 잊고 있었다. 길을 잃을 자유, 우연히 들어간 식당이 만족스러울 때의 쾌감.

하지만 단순히 아날로그의 향수만으로 이 여행이 완벽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해방된 ‘인터넷 프리’ 환경에서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의 서로에게만 집중하게 된 것이 컸다. 식사 중에 틈틈이 카톡을 확인하는 대신에 손을 한 번 더 잡았고, 무섭게 오르는 집값 이야기 대신 서로가 느낀 오늘을 궁금해했다.

결혼한 지 2년이 지나면서 대화에서 현실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눈에 띄게 늘어갔다. 연애 때는 어떤 얘기를 했지? 기억이 가물거렸다. 해결책으로 매주 하루만큼은 우리 이야기만 하자 약속했지만 지키기는 쉽지 않았다. 가족, 명절, 야근, 집값, 생활비, 진로, 출산 등 언제나 당장 오늘 몫의 현실들이 산재해 있었고 카톡으로, 메일로, 뉴스로 날아들었다.

잊고 있었다. 내가 이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눈을 맞추고 오로지 서로에 대해 말할 때 그 대화가 얼마나 달콤한지.

모바일로 어디서나 자유롭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보다 나은 생활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반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길을 잃을 자유와, 연결되지 않고 몰라도 될 권리를 빼앗겼는지도 모른다. 물론 의도적으로 쓰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지도 앱을 켜지 않고 길을 헤매는 것은 마치, 비 오는 날 우산을 손에 들고 쓰지 않는 것과 같이 작위적일 것이다. 카톡을 두고 문자를 쓰는 것, 모바일 메일을 굳이 확인하지 않는 것, 남들 다 아는 뉴스를 나 혼자만 모르는 것 또한 사회인으로서 용납될 리 없다. 그래서 더욱 가끔은 ‘인터넷 프리’이고 싶다.

다음 여행에도 유심은 사지 않기로 했다. 길을 잃을 자유를 되찾았고, 사랑은 얻고, 돈은 굳었다.
 
김지영 원스토어 이북사업팀 매니저
#호주 여행#인터넷 프리#길을 잃을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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