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노지현]훈방으로 아이들을 구할 수 있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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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현 사회부 기자
노지현 사회부 기자
긴 연휴에 남들은 해외에서, 국내에서 가족 친지와 명절을 보냈을 터다. 하지만 추석에 하나밖에 없는 딸 49재를 지낸 엄마(47)는 한 달 전보다 한숨이 더 깊어졌다.

중학교 2학년이던 딸, 문모 양은 6월 24일 집에서 친구들과 있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기형성 뇌출혈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지만 딸은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의학적으로 기형성 뇌출혈은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한다. 14세 소녀에게 무슨 스트레스가 그리 많았을까. 쓰러지기 이틀 전 문 양은 자신이 다니던 서울 동대문구 K여중 상담실을 찾았다.

4월 평소 친하게 지낸 고등학교 1학년 A 군 페이스북에 문 양이 댓글을 단 것이 발단이었다. ‘요즘 바쁜가 봐. (내 페이스북에) 댓글 잘 안 다네’라는 취지의 글이었다. 이를 본 A 군 여자친구 B 양(중2·13)이 문 양을 불러냈다. B 양은 문 양 이마를 손으로 밀치며 “네가 걸레냐”라는 등 욕설을 퍼부었다. 이어 문 양의 뺨을 수차례 때리고 화를 냈다. 다른 친구들 앞에서 급작스레 당한 일에 문 양은 심한 모멸감이 들었지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고 한다.

6월에도 B 양은 문 양을 공터로 불러냈다. 두려워진 문 양이 “안 나가겠다”고 하자 다른 친구로 하여금 나오게 했다. B 양은 문 양에게 “나를 피하는 게 맘에 안 든다” “기분이 나쁘다”며 다시 뺨을 때렸다.

그날 이후부터 문 양은 택배기사가 누른 집 초인종 벨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누가 또 공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공포감이 들었다고 한다. 인근 파출소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지만 경찰은 “학생들 다툼이어서 경찰이 해결해 주기 어렵다”고 답했다.

이상은 문 양이 고민 끝에 학교 상담실을 찾아가 상담교사 앞에서 작성한 사안확인서에 나타난 내용이다.

문 양 어머니는 딸아이가 쓰러지고 나서야 상담교사에게서 그 같은 고민을 듣고는 가슴을 쳤다.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딸은 엄마에게조차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문 양 학교와 B 양 학교에서 합동으로 학교폭력위원회가 소집됐다. B 양에게 며칠간 유기정학과 문 양 가족에게 서면으로 사과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문 양 어머니는 “딸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데 B 양도, B 양 부모도 사과하러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경찰에 B 양을 폭행과 협박 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경찰은 “가해자 나이가 만 13세가 안 된다. (처벌받아 봤자) 훈방 정도 나올 확률이 크다”며 고개를 저었다. 또래 학생을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구타해도 ‘어리다’는 이유로 구속조차 되지 않는데 만 14세도 안 된 아이가 뺨 몇 대 때렸다고 법의 심판을 받지는 않는다는 뜻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만 14세 이하 촉법소년(觸法少年)에게는 형사책임을 묻지 않는 소년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가 이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수그러들었다. 시간이 흘러 중학생 강력범죄나 학교폭력, 괴롭힘이 다시 사회문제가 되면 잠깐 소년법 개정이 이슈로 떠올랐다가 사라질지 모른다. 물론 안다. 법이 모든 걸 해결해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처벌이 두려워서라도 ‘멈칫’하게 만들 필요는 있지 않을까. ‘가정에서 잘 훈육하기 바란다’는 훈방도, 학교도 못 미덥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요즘, 그래서 더 법에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다.

노지현 사회부 기자 isityou@donga.com
#추석#학교폭력#훈방#만 14세 이하 촉법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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