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오역의 프레임’ 이라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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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트위터 글이 또다시 한국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일부 언론이 ‘기름을 구하려 늘어선 행렬(gas lines)’을 ‘(남북한과 러시아를 잇는) 가스관’으로 오역해 문재인 대통령의 가스관 사업 구상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한 때문이다. 두고두고 회자될 오보 참사일 것이다.

청와대로선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으리라. 청와대 관계자는 “여러분 머릿속에 뭔가 ‘프레임’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서운함을 토로하기까지 했다. 트럼프가 이미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유화책(appeasement)’이라고 비판했던지라 지레 한국을 비판했을 것이라는 무의식적 선입견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 논란을 접하고 솔직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gas line’에는 ‘천연가스 수송에 사용되는 관(pipeline)’이란 의미도 들어있으니 나라고 서툰 영어실력에 오역의 함정을 피할 수 있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더욱이 지난주 미국 방문에서 접한 워싱턴 분위기로 인해 바로 청와대가 말한 그 ‘프레임’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태이기도 하다.

“한국, 대화 집중-압박 시늉”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최근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은 미국인의 대북 인식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입을 모았다. 북핵 위협을 얘기할 때면 늘 ‘전대미문의’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한국은 미국의 심리 상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도 했다. 그러니 대북 군사옵션은 과거엔 생각할 수 없는(unthinkable) 것이었지만 이젠 검토 가능한(conceivable) 현실이 됐다는 설명이다.

나아가 한미 정부 간 인식의 차이, 정책적 엇박자를 걱정하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미국의 입장은 분명하게 압박, 압박, 압박이다. 그런데 한국은 좀 다르다. 계속 대화 재개를 모색하고 (대화 신호에) 귀 기울이면서 압박을 얘기한다.” 문재인 정부가 계속 대화를 강조하다 압박은 시늉만 낸다는 노골적인 불만의 토로였다.

일례로 한국 정부는 남북 적십자회담과 군사당국회담을 제의하기 이틀 전에야 미국에 알렸다고 한다. “이웃과 공유하는 나무가 있는데, 지저분하니 이틀 뒤 사람 불러 자르기로 했다고 이웃에 말한다면 그건 협의가 아니라 통보다.” 한 전문가는 “문 대통령이 운전자 역할을 하겠다고 하지만, 길이 없는 곳에서 빙판길을 운전하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한국 탓만 하진 않았다. 지금 한미관계는 노무현-조지 W 부시 시절과 닮았다며 “차이라면 그땐 노무현이 돌발 변수였지만 지금은 트럼프가 돌발 변수”라고 했다. 트럼프의 트윗에도 놀라지 말라고 했다. “트럼프를 왕이라 생각하라. 아침에 일어나 이런저런 생각을 얘기하고 트윗을 날린다. 그러면 신하들은 ‘어떡하지? 뭘 해야 은총을 입지?’ 고민한다. 그의 트윗은 정책이 아니다.”

‘보스 DNA’ 케미로 허물라

워싱턴의 기류를 접하면서 슈퍼파워 미국의 숨기지 못하는 ‘보스 DNA’를 새삼 절감했다. 거기에 ‘마초 DNA’까지 지닌 트럼프에게 문 대통령이 느낄 무력감은 더욱 클 것이다. 하지만 미국을 움직이지 않고선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게 한반도 문제다. 북한마저 “주제넘게 끼지 말라”는 형국이니. 전문가들은 결국 한미 당국자들이 자주 만나 ‘케미스트리(궁합)’를 맞추고 동맹의 끈을 단단히 조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오역 사태를 두고 “우리는 언론인들이 문 대통령보다 다른 나라 정상이나 언론을 더 신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미국 사람을 더 믿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생각은 알아야 하기에 그들의 얘기를 전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도널드 트럼프#트럼프 트위터#오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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