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고미석]할리우드판 블랙리스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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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음악의 혁신을 가져온 작곡가 아널드 쇤베르크는 유대인으로 독일에서 활동했다. 그는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마자 박해를 피해 미국행을 택했다. 당시에는 유대인뿐 아니라 좌파 예술인들도 탄압받았다. 나치 정권은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책들을 몽땅 불태웠다. 나라 밖을 떠돌던 그는 1941년 미국에 망명했다. 아뿔싸! 이번엔 할리우드에 매카시 광풍이 불어 브레히트는 또 한 번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한동안 탄핵 정국이 떠들썩했다.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구속 사유도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인에 대해 지원을 배제하는 명단을 만든 의혹과 관련된 것이다. 요즘 미국에서는 ‘할리우드판 블랙리스트’ 의혹이 제기됐다. 영화배우 팀 앨런이 한 토크쇼에서 “할리우드에서 공화당 지지자들은 1930년대 나치 치하에서 사는 것과 같다”며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미워하면 서로 닮는 것일까. 팀 앨런은 할리우드 문화권력인 진보 진영을 겨냥해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연예인을 배척하는 ‘비관용적 엘리트주의’라고 일침을 놓았다. 입만 열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트럼프를 욕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들의 권력을 휘둘러 ‘할리우드의 소수파’를 핍박하는 위선적 행태를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따르면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보수 성향의 연예인 2500여 명은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공화당 지지’ 낙인이 찍히면서 배역이나 출연 기회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미국의 할리우드판 블랙리스트에는 공통점이 있다. ‘블랙리스트’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논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기 정부에서는 ‘블랙리스트 학습효과’를 바탕으로 은밀한 블랙리스트로 문화계를 쥐고 흔들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권력에의 복종을 강요하든, 집단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 개인을 핍박하든, 유무형의 블랙리스트는 민주주의 체제를 흔드는 위험한 징조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아널드 쇤베르크#히틀러#문화계 블랙리스트#할리우드 블랙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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