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광영]‘낙태 진료실’ 앞 서성이는 수많은 사연을 떠올리며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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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사건팀장
신광영 사건팀장
간호사의 호명에 진료실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난다. 진료실 문 앞에서 소리가 멈추고 몇 초간 흐르는 정적. 산부인과 의사라면 거의 겪어봤다는 특유의 머뭇거림이다. 문이 열리면 의사의 예상은 대부분 적중한다. 사는 곳에서 1, 2시간씩 걸려 찾아온 여성들이다. 막상 의사 앞에선 별말이 없다. 낙태를 해달라는 부탁뿐. 의사가 난색을 표하면 저마다 사연을 꺼내놓는다. 하지만 소용없기 일쑤다. 돌아서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단념의 기색을 찾아보긴 어렵다. ‘해주는 병원’을 찾아 또 전전하기 시작한다. 28년 차 산부인과 의사는 자신의 딸 또래의 20대 환자에게 “엄마가 된 여성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다독였다. 하지만 이내 답할 수 없는 질문에 직면했다. “선생님 따님이어도 낳으라고 하실 건가요?”

요행히 수술실로 보내진 여성들은 ‘굴욕의자’라고 불리는 수술대에 앉는다. 하반신 아래로 분홍 커튼이 드리워지고 그 너머로 철과 철이 맞부딪치는 소리를 듣는다. 차가운 금속이 몸속을 파고든다. 굴욕감에 두려움이 겹친다. 이어 다가오는 죄책감. 단지 점 하나로, 심장 소리로 살아있음을 증명해 왔던 태아의 몸부림이 떠오른다. 평생 가슴에 묻을 비밀의 죄를 안고 수술대를 내려온다. 환자든 의사든 낙태 수술방의 어느 누구도 이게 최선이라 여기는 사람은 없다.

5월 24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심판 공개변론을 앞두고 법무부는 ‘낙태 찬성’ 여성들이 무책임하다고 했다. 얼마 전 본보 취재팀이 낙태를 경험한 여성과 의사, 낙태를 고심하다 결국 출산한 비혼모 등 15명을 인터뷰한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낙태로 잃게 될 생명에 가장 가슴 아파하는 사람은 낙태를 하려는 당사자였다. 이진성 헌법재판소장도 공개변론에서 “태아 생명에 가장 큰 관심을 갖는 사람은 바로 임신한 여성일 것”이라고 했다.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는 자기 인생을 책임지려는 결정은 무책임하지 않다.

낙태 여성과 이를 도운 의료진을 벌하는 낙태죄는 태아의 생명권이란 대의 아래 다른 생명권을 희생시킨다. 우선 산모 생명을 위협한다. 낙태하려면 ‘고비용 고위험’에 내몰린다. 낙태해 줄 의사를 찾아 헤매는 사이 임신 기간은 늘어난다. 1주일씩 늦어질 때마다 수술비는 10만 원씩 오른다. 배가 불러올수록 수술하려는 의사도 드물다. 위태로운 몸은 무자격자 손에 맡겨진다. 루마니아는 낙태금지법이 있었던 1966년부터 1989년까지 23년간 모성사망비(임신 관련 질환으로 숨진 산모 비율)가 이전보다 7배 늘었다.

낙태의 기로에서 생명을 택한 여성들은 ‘사회적 생명’의 박탈을 호소한다. 막상 낳았더니 ‘없었으면 하는 생명’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고귀한 존재인 태아와 산모가 출산과 동시에 ‘멀리해야 할 존재’로 거듭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생명을 귀히 여긴다는 낙태죄의 이 같은 자기모순을 법관들도 이해하는 듯하다. 실형 선고 없이 대부분 벌금형이다. 하지만 법이 살아있는 이상 1953년 제정 이후 60년 넘게 여성의 기본권을 옥죄는 건 그대로다. 게다가 요즘 낙태죄는 남자친구나 남편이 상대의 낙태 사실을 약점 잡아 이별을 거부하거나 이혼 소송에서 압박할 카드로 주로 쓰인다. 본질에서 그만큼 멀어져 있다.

그간 낙태 논쟁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간 대결로 보는 이분법에 가까웠다. 생명권이라는 공익 앞에 결정권이라는 사익을 위축시키는 접근이다. 이제 산모와 태아의 생물학적 생명과 사회적 생명의 균형을 맞추려는 논의가 필요하다. 국민 80%가 가톨릭 신자로 낙태를 엄격히 금지해온 아일랜드가 5월 25일 국민투표로 낙태죄를 없앤 것도 사회적 생명의 가치를 무겁게 받아들인 결과로 보인다. 사람답게 숨쉴 수 있어야 살아있는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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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사건팀장 neo@donga.com
#낙태죄#태아#사회적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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