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사생아’ 종전선언이 효자 되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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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논설위원
이기홍 논설위원
북한 김정은에게 종전선언은 ‘복덩이’다. 주한미군 철수 등 북한을 적으로 가정한 모든 현존 질서의 변화를 요구할 말발이 생기며, 대내적으로는 체제안보를 이뤄낸 지도자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다. 덤으로 남한 내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 등 남남(南南)갈등을 불붙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보물단지인 종전선언 카드는 사실 북한은 꿈도 꾸지 않았는데 선물처럼 주어진 것이다. 북한은 평화협정 체결은 줄기차게 요구해 왔지만 종전선언은 꺼낸 적이 없었다.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에 가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거다.

현대사에서 유례가 없는 종전선언이라는 아이디어를 만든 건 임기만료를 1년 여 앞둔 노무현 청와대였다. 힌트는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2006년 11월 베트남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핵을 폐기하면 한국전쟁을 완전히 종결짓는 공동서명을 할 수 있다”고 말한 데서 얻었다. 하지만 당시 부시 대통령이 말한 전쟁 종식 서명은 평화협정 체결을 의미하는 것이며, 북핵 폐기 완료를 전제로 가능하다고 미 행정부는 거듭 분명히 했다.

그런데 청와대 참모들은 평화협정에서 분리시킨 이벤트 형식의 종전선언을 창안해 워싱턴을 상대로 끈질긴 설득전을 벌였다. 하지만 미국은 세리머니 성격의 선언은 불필요하며 비핵화 완료시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된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었다는 게 당시 직간접으로 관여한 한미 고위 외교관들의 전언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부정확한 보고 탓인지 미국이 거의 동의해준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2007년 9월 호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후 공동 회견에서 부시 대통령의 모두 발언 뒤 “각하께서 종전선언 말씀을 빠뜨린 것 같다”고 했고 부시 대통령이 “전쟁을 끝낼 평화조약의 체결 여부는 김정일에 달려있다”고 답하자, 노 대통령은 또다시 “김정일 위원장이나 우리 국민은 그 다음 얘기(종전선언)를 듣고 싶어한다”고 채근했다. 이에 부시 대통령이 퉁명스런 표정으로 “내가 그것을 어떻게 더 이상 분명히 할 수 있느냐”고 하는 이례적인 장면까지 연출됐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은 약 한달 뒤 평양에서 김정일에게 종전선언을 제안했고 ‘3국 또는 4국 정상이 한반도에 모여 종전선언을 하는 걸 추진한다’는 내용이 담긴 10·4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미국은 “종전선언은 북핵 폐기가 종료된 뒤 가능하다”고 반박했다. 사실 한국전 휴전협정은 전투의 일시적 정지가 아니라 전쟁상태의 종결을 규정한 협정이어서 종전선언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다는 게 학계의 의견이다. 서언(序言·전문에 해당)에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적대행위와 일체 무장행동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을 확립할 목적으로”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종전선언은 평화체제의 첫 삽을 뜬 대통령으로 레거시를 남기고 싶었던 의욕으로 임기 말에 추진되다가 불발됐고 그 뒤 10년간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 올 4·27 판문점 선언에서 “연내 종전선언”으로 부활한 것이다. 한 외교소식통은 “노무현 정부 시절의 종전선언 추진 경과를 정확히 전달받지 못한 것인지 트럼프 행정부가 쉽게 동의할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고 전했다. 국내 진보진영이 종전선언을 원하고 있는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물론 종전선언이 핵심주체인 미국의 동의 없이 태어났다 해서 무의미한건 아니다. 잘만 활용하면 비핵화를 촉진하는 선순환의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종전선언이 북한의 비핵화 미루기 명분이 되어버렸다.

이는 종전선언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선언이 북한의 요구대로 새로운 관계수립과 신뢰구축을 비핵화 보다 우선시하는 구도로 작성된데 따른 부작용이다.특히 미국은 선(先)비핵화 진전, 후(後) 관계개선·체제보장이 기본원칙이지만 싱가포르 선언은 ‘새로운 조미관계 수립이 조선반도 평화 번영에 이바지하고 신뢰구축이 비핵화를 추동한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되어 있다. 이 논리대로면 종전선언을 통해 평화와 신뢰를 구축하는게 먼저라는 북한의 주장이 먹힐 수 있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비록 의회와 행정부 내 전문가들의 반대 때문에 오락가락하지만 종전선언에 내심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11월 6일 중간선거 이전에 더 확실한 성과를 내고 싶은 욕구의 발로다.

미 중간선거는 북핵 문제의 변곡점이 될 것이다. 김정은의 호의에 매달려온 트럼프는 선거 후엔 정치적 부담이 줄어들고, 교착상태 지속에 따른 피로감 때문에 강경책으로의 회귀 욕구를 느낄 것이다. 특히 야당인 민주당이 상하원을 압도적 표차로 장악하면 대북 정책 기류에 상당한 변화가 올 수 있다. 김정은에겐 골든타임이 두달 반 밖에 남지 않았다.

한미 양국에겐 종전선언은 비핵화 열차가 추동력을 잃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귀중한 로켓이 될 수 있다. 다가올 남북, 북-미 정상회담 등을 통해 현재의 교착상태가 풀린다 해도 신고 사찰 폐기 검증 등으로 이어지는 긴 비핵화 과정에서 언제 어떤 장애물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비핵화 열차는 국제제재라는 기본 채찍을 토대로 여러 당근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미 한미연합훈련 중단이라는 당근은 써버렸다. 종전선언 마저 열차가 출발도 하기 전에 써버리면 11월 이후의 비핵화 진행은 더 힘겨운 줄다리기가 될 것이다. 비핵화 열차가 그 누구도 내릴 수 없는 본 궤도에 올라선 뒤 쓰는 게 맞다.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종전선언#북한#비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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