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갑식]최고의 밥상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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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식 문화부장
김갑식 문화부장
거의 20년 전인 1998년 ‘최고의 밥상’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요리에 관심 있는 동호인들이 출연해 자신들이 만든 요리로 우열을 가리는 형식이었다. 지금은 ‘먹방’이 오락과 교양 프로그램의 대세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에는 획기적 시도였다.

이 프로와 ‘꼬마 요리사’(1994년) 등 요리 프로그램을 연출한 최영인 SBS PD는 최고의 밥상을 찾았을까. 자연스럽게 여러 고수(高手)의 맛을 접했지만, 그들에게서는 답을 얻지 못했다는 게 그의 말이다.

맛과 TV 시청률에 관한 그의 해석이 흥미롭다. “아는 맛, 예측 가능한 맛이 나와야 침샘이 고이고 시청률이 뛰어요. 잘 모르는 맛은 요리가 화려해 보여도 남의 맛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추억이 있는 엄마의 손맛을 최고의 밥상으로 자주 꼽는 것 같아요.”

정서적인 측면을 빼면 조선시대 최고의 밥상은 수라상, 즉 ‘왕의 밥상’이다. 전국 각지에서 진상된 최상의 재료로 최고 수준의 요리사가 만들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그 밥상이 지금도 최고일지는 미지수다. “‘가장 맛있다’는 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지죠. 당시 좋은 재료라고 해도 지방에서 서울로 오기 때문에 절이거나 말려야 했으니까요. 왕의 밥상은 ‘육해공’ 재료를 골고루 살려 예법에 맞춰 올린 건강식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산지에서 가공하지 않고 즉석에서 먹는 요즘 사람들의 밥상이 최고 아닐까요?”(한복려 궁중음식연구원장)

왕의 밥상에서는 상징적 메시지를 담은 정치적 행위가 이뤄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그 밥상은 자신의 오감(五感)을 통해 한 해 수확을 가늠하고 백성의 밥상머리 속사정까지 미루어 짐작해야 하는 통찰의 기회였다. 그래서 역대 왕들은 기근이 심해 백성이 굶주릴 때는 물에 만 밥, 수요반(水요飯)만 먹기도 했다. 폭군 연산군은 사슴 꼬리나 바다거북 같은 진귀한 음식에 식탐을 보였다고 한다.

기록에는 왕의 밥상과 관련한 표현들이 나온다. 철선(撤膳)은 백성들이 오랜 가뭄과 홍수에 시달릴 때 고기반찬을 거두는 것을 가리킨다. 각선(却膳)은 민생과 신하들의 당파 싸움 등 여러 이유로 왕이 아예 수라를 들지 않는 것이다.

감선(減膳)은 왕이 근신하는 뜻으로 반찬의 가짓수나 식사 횟수를 줄이는 것이다. 그 기록을 보면 영조가 79회로 압도적으로 많고, 정조(29회) 중종(28회) 성종(21회)의 순이었다. 특히 영조는 식음을 전폐하는 ‘수라 스트라이크’로 조정을 곧잘 뒤흔들었다.

곧 한가위다. 정치권에서 추석의 밥상머리 민심은 전통적으로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문과 방송 등 언론 매체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여론 형성이 요즘의 추세다. 그래도 추석은 여전히 부모와 형제는 물론 친척, 지인이 모처럼 어우러지는 집단적 소통의 장이다. 아무리 “정치 얘기하지 말라”는 불문율이 생겼다 해도 소주 한잔을 나누다 보면 정치 훈수가 빠질 수 없다.

올해 추석 밥상머리 이슈의 메인 메뉴는 북핵을 둘러싼 안보 문제와 갈수록 어려워지는 나라와 집안 살림살이, 협치는 실종된 채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정치권, 내년으로 다가온 지방선거 등으로 다양하게 차려져 있다.

각 정당이 추석 민심을 잡기 위해 5당 5색의 홍보물을 준비해 서울역과 버스 터미널 등에서 인사에 나섰다고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홍보가 아니라 경청이다. 이 시기는 정치권이 여의도의 우물을 벗어나 자신들의 상차림을 겸허하게 평가받고 점수를 매겨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이 아니라 열린 가슴이야말로 최고의 밥상을 만들 수 있는 최상의 재료다.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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