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성희]나도 생존배낭 챙겨볼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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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희 논설위원
정성희 논설위원
“그 책이 어디 있더라.” 한 번도 들춰보지 않은 채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을 찾아냈다. 제목은 ‘재난이 닥쳤을 때 필요한 단 한 권의 책(When All Hell Breaks Loose)’이다. 저자인 코디 런딘은 야생생존훈련학교 창업자로 내셔널지오그래픽, 디스커버리 채널을 비롯한 수많은 매체에 출연해 자연재난 같은 극한 상황에서의 생존법을 전파해온 인물이다.

북-미 치킨게임 격렬한데

미군 전략폭격기가 북한 해안선을 따라 비행하고 북이 요격을 선언하는 일촉즉발 단계까지 오자 불현듯 ‘서바이벌 가이드’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을 봐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런딘은 지진 태풍 등 자연재난을 가정했지만 전쟁만큼 생존이 급박한 상황이 있겠는가. 그는 “성공적인 생존의 특징은 적절한 준비와 약간의 행운”이라며 플러그를 뽑거나 조명만 꺼도 아수라장이 되어버리는 현대문명과 편리한 인프라에 의지해 살아감으로써 작은 재난에도 생명을 잃거나 다치는 현대인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미국이 베트남과 이라크에 이어 한반도에서 또 하나의 전쟁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예상이 나오고 있는데 당사자인 우리가 의연하니 세계가 놀라고 있다. 이런 차분한 태도는 북의 말 폭탄에 둔감해진 탓일 수도, 한반도에 태어난 숙명에 길들여진 탓일 수도 있지만 이번엔 확실히 다른 것 같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통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생존배낭 꾸리기가 그 증거다. 생존배낭뿐 아니라 휴대용 라디오나 전투식량 판매도 크게 늘었다.

주변에서 전쟁이 날 경우 행동요령을 정했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서 놀랐다. 한 신혼부부는 연락이 두절되면 ‘부산역’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또 다른 가족은 걸어서라도 지하 방공호를 갖춘 외삼촌댁에서 모이기로 했다고 한다. “설마 전쟁이 나겠어?” 아무 대비도 없이 살았던 나는 난감해진다.

생존배낭 준비나 긴급대피 훈련은 공공 영역이 아니라 민간 분야에서 활발하다. 경기도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인은 “우리 회사가 공격 타깃이 될 리는 없지만 혹시 삼성전자가 공격받으면 우리에게도 피해가 닥칠 수 있어 핵심 부품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직원을 대피시키는 훈련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묘한 것은 많은 기업이 쉬쉬하며 대피훈련을 한다는 점이다. 정부가 전쟁은 있을 수 없다는데 혹여 기업이 앞장서 불안감을 조성한다는 비판을 들을까 봐 그러는 듯하다.

실제로 본보가 9월 초 ‘생존배낭을 꾸리는 시민들’이라는 기사를 보도하자 동아일보가 위기감을 조장한다고 주장하는 매체가 있는가 하면 개그우먼 강유미 씨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생존배낭을 소개하자 전쟁을 부추기느냐는 댓글이 쏟아졌다. 5∼7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도 37%가 한반도 전쟁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전쟁을 바라는 언론과 국민이 어디 있을까마는, 우리가 주도권을 못 가진 상황에서는 1%의 가능성에라도 대비해야 하는 게 정부다. 그런데도 북-미가 벌이는 치킨게임을 정부가 지켜볼 수밖에 없으니 불안한 개인과 기업이 스스로 대비하는 것이다.

“스스로 안전 챙기자”

결론적으로 런딘의 책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생존하려면 적절한 준비와 약간의 행운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우리에겐 약간의 준비와 엄청난 행운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아서다. 그래도 결국 “당신의 안전은 정부가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한 가지 메시지만은 마음에 남았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재난이 닥쳤을 때 필요한 단 한 권의 책#당신의 안전은 정부가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 달려 있다#생존배낭#전쟁시 행동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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