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名문장]인생은 훨씬 뒤에 시작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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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희 소설가
신주희 소설가
《“인생은 사람이 태어난 때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하루하루가 새로 얻은 날일 것이다. 인생은 훨씬 뒤에 시작된다. 너무 늦게 시작되는 경우도 많은데, 시작하자마자 끝나버리는 인생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한 시인은 탄식한 것이다. 아, 아쉽게 이루어지지 못한 일의 역사는 누가 쓸 것인가.”

―조제 사라마구, ‘돌뗏목’》
 

만약 이베리아 반도가 유럽 대륙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조제 사라마구의 소설 ‘돌뗏목’의 설정이다. 소설 속에서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에서 떨어져 나와 거대한 돌뗏목처럼 바다 위를 표류한다. 이 초유의 사태를 방관하는 주변 국가들이 나오고, 반도에서 혼란을 겪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 혼란을 가로지르는 다섯 명의 여행자가 있으며, 이들의 여정 속에는 갈등과 사랑, 균열과 성장이 있다. ‘돌뗏목’이 발표된 시기를 보자면 이 작품의 설정이 단순히 재미를 위한 상상의 산물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1986년, 그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유럽연합(EU)의 전신인 유럽공동체(EC)에 가입한 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통해 포르투갈 출신의 작가가 던졌던 질문을 떠올려 본다. 오디세우스처럼 떠도는 반도를 멈출 새로운 세상의 시작은 어디인가. 우리는 작가의 거대한 상상력이 반도가 분리되는 것에만 멈춰 있지 않음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소설 속에서 반도가 떠내려가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각종 대응은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하다. 작가는 기이한 경험을 통해 모인 다섯 사람의 여정을 쉼표와 마침표까지 아껴가며 오래도록 들려준다. 게다가 이들은 표류하는 반도를 구하는 영웅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주어진 삶을 지속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비친다. 농사 경험이 전부인 촌부와 책상 앞에만 앉아 있던 샐러리맨, 현명하지만 너무 늙어버린 노인과 스스로를 어리석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위기의 순간에 서로의 모자람을 채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음이 이들을 준비시키고, 결핍과 부족이 진정한 의미의 연대를 깨닫게 해준다. 그렇다고 여행을 마친 이들에게 새롭게 제시된 출발점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운명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변화는 늘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들에게는 여행의 이력이 생겼다. 미래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에 핵과 평화, 균열과 공조라는 단어가 어지럽게 섞이는 요즘이다. 지금의 한반도가 소설 ‘돌뗏목’의 반도와 겹쳐 떠오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느 쪽에도 일방적이지 않은 공존의 가치가 절실한 요즘,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분명 소설 속 주인공들이 경험했던 여행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앞둔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전쟁에서, 가난에서, 분열과 억압에서 스스로 벗어나곤 했던 우리 자신의 강인했던 그 힘을.

신주희 소설가
#조제 사라마구#돌뗏목#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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