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홍형진]나의 구조조정, 남의 구조조정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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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형진 소설가
홍형진 소설가
증권사에 잠시 재직하며 기업·산업 분석 보고서의 품질을 개선하는 일을 담당한 적이 있다. 그때 업계에서 통용되는 몇몇 문구를 보고선 묘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생생하다. 증권사 보고서는 업황, 실적, 주가 등에 주목하기에 대중이 주로 접하는 기사, 칼럼 등과는 감정의 결이 제법 다르다. 숫자 개선에 도움이 되면 호재, 반대의 경우는 악재로 부른다.

지진을 예로 들어보자. 외국에서 강한 지진이 발생해 사람이 여럿 죽고 공장도 크게 파괴됐다면 보통은 참사로 인식하고 애도의 목소리를 건넨다. 하지만 증권사 보고서는 다르다. 만약 그 지역 공장의 생산 차질로 우리나라 기업이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전망되면 호재라고 표현한다. 인력 구조조정도 마찬가지다. 특정 산업이나 기업이 인력을 대거 감축하는 상황에서도 증권사 보고서는 다음 질문에 주목한다. 그를 통해 실적이 개선될 것인가? 주가가 상승할 것인가? 대답이 긍정적이면 구조조정 역시 호재다.

누군가는 분노를 터뜨릴 테다. 증권업계 사람들은 탐욕스럽고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냉정히 바라보면 그들은 자기 직무에 충실한 것뿐이다. 증권업의 본질은 자본 유통, 자산 관리 등이기에 그런 관점에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게 도리어 직업윤리에 부합한다. 사회의 통념을 거스를지라도 그렇게 말하는 게 그들의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 역시 굴레에 갇혔다. 증권업, 넓게는 금융업 전반에서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다. 온라인을 통한 정보 교류와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영업 인력을 대거 감축하는 흐름이다. 내가 재직한 회사도 그랬다. 직원의 20%가량을 내보내고 임금도 10% 삭감한 직후여서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이웃 회사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정은 비슷했다.

구조조정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층적이다. 누군가는 살인, 절대악으로 바라보는 반면 누군가는 성장을 위한 재편 과정으로 바라본다. 사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다. 큰 틀에서 보면 합리적인 절차지만 당사자 입장에선 죽도록 괴로운 시간이니까. 내 아버지 역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기에 20년 넘게 재직한 회사를 명예퇴직하고 자영업자로 탈바꿈했다. 10대였던 우리 형제에게 내색은 않았지만 힘든 시간을 거쳤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회사는? 그를 발판으로 지금까지 승승장구했다. 구조조정은 옳은 판단이었다.

구조조정은 합리 또는 공감의 탈을 쓰고 반대 견해를 적대시하는 태도로 접근해선 곤란하다. 성장을 위해 진행될 수밖에 없음을, 그러나 당사자는 매우 고통스러움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 나의 구조조정은 살인이고 남의 구조조정은 정의일 수 없단 뜻이다. 합리의 틀 안에서 변화와 성장을 꾀하되 개인의 노동권을 최대한 지원하는 방향으로 진보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실업급여 제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꼴찌 수준이고 재취업을 위한 교육 역시 부실하다. 한데 이를 확충하자고 주장하면 세금을 축낸다며 반발하는 이가 꽤 된다. 웃긴 건 평소 ‘유연한 노동시장’을 지향하는 부류에도 그리 말하는 이가 많다는 점이다. 아무리 각자도생의 시대라고 하나 정도가 심하지 않나 싶다.

홍형진 소설가



#구조조정#노동권#실업급여#노동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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