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배극인]자멸해도 괜찮다는 식, 한국의 기업 대접법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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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극인 산업1부장
배극인 산업1부장
최근 국내 한 전선회사는 유럽에서 해저 광케이블을 까는 1억5000만 달러짜리 입찰에 떨어졌다. 해외 경쟁사의 집요한 노이즈 마케팅 때문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국내에서 담합을 했다고 조사하고 제재했는데, 경쟁 업체가 관련 기사까지 번역해 발주처에 돌렸다고 한다. 이 회사 대표는 “우리뿐만이 아니다. 해외 사업 입찰 때 경쟁 기업들이 요즘 한국 대기업 관련 기사를 인용해 깎아내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우려했다.

이처럼 우리 기업들에 대한 국내 뉴스 파장이 국내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 게 요즘 글로벌 경쟁 시장 상황이다. 그렇다고 기업들의 잘못을 눈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쇠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기업인들의 얘기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벌을 주더라도 죗값에 상응한 수준의 ‘상당성’을 벗어나 과도한 때리기로 우리끼리 자멸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한 건했다는 식의 ‘부풀리기’나 특정 시기의 잘못을 여러 차례 나눠 연타를 가하는 ‘쪼개기’, 의혹을 흘려 기정사실화하는 ‘토끼몰이’가 상당성을 벗어난 주요 사례다. 검찰과 경찰, 국세청, 공정위가 순번 돌듯 기업들을 덮치는 모습도 마찬가지로 불편한 풍경이다. 자료를 탈탈 털린 상태에서 정상적인 경영을 할 수 없을 지경인데, 기업인들은 살점이 튀는 글로벌 경쟁 시장에서 적군도 아닌 아군에게 급소를 찔린 후 던져지는 기분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지상파 방송들까지 가세해 기업인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만나는 기업인마다 “어느 한 곳에 걸리면 다른 지상파까지 나서 경쟁적으로 매질한다. 걸리면 죽는다는 분위기”라고 한다. 특히 한국 대표 기업인 삼성은 집중 타깃이다. 어느 지상파는 뉴스 시간의 절반 가까이를 할애해 매일같이 삼성을 공격하고 있다. 방송계 일각에서는 “삼성이 죽을 때까지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수사기관이 압수수색해 확보한 것으로 보이는 문건들까지 흘러나와 ‘토끼몰이’에 활용되고 있다.

혹시나 하고 전화를 돌려보니 언론학자들도 저널리즘의 정상적인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는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선명성 경쟁이 지나쳐 선정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국내 지상파 방송사는 공영방송이라는 점을 내세우고 있는데, 그럴수록 사안의 양면성을 살피고 비판 대상의 반론권을 보장해 균형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기업에 대한 선입관이 깔린 일방적인 비판 프로그램은 결국 신뢰를 잃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삼성 같은 한국 기업이 죽으면 좋아할 것은 해외 경쟁 기업이다. 중국 화웨이는 공개적으로 ‘타도 삼성전자’를 호언하고 있고 칭화유니, 푸젠진화반도체는 하반기부터 D램 등 메모리반도체를 쏟아낸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삼성전자 반도체 특허 침해 조사로 노골적인 견제에 나섰고 소니 샤프 등 일본 기업들도 ‘타도 삼성’을 외치며 글로벌 합종연횡을 서두르고 있다.

물론 한국 기업들의 과거 관행에 문제도 있다. 하지만 그런 승부욕과 집념이 있었기에 한국은 반세기 만에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올라설 수 있었고, 세계인의 축제인 여름올림픽과 월드컵에 이어 겨울올림픽을 유치했다. 전쟁의 폐허에서 출발한 우리 국민들도 이제 해외에서 당당히 어깨를 펴고 있다. 우리 기업들에 허물은 허물대로, 공은 공대로 ‘이에 상당한’ 대접을 해주는 게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배극인 산업1부장 bae2150@donga.com
#대기업#뉴스#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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