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에서 숨져간 딸…” 피해자 외면한 법에 눈물 흘리는 구급대원 엄마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3일 16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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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사회]

대전의 119 구급대원 서모 씨(40·여)는 항상 약을 챙긴다. 딸을 잃은 충격으로 얻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인한 발작 때문이다. 휴직도 생각했지만 “혼자 있을 경우 나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의사의 권유로 계속 출근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10월 자신이 살던 대전의 아파트 단지에서 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 김지영 양(가명·당시 5세)의 어머니다. 서 씨는 요즘 가해 운전자 측이 합의를 요구하면서 약을 먹는 횟수가 늘었다고 한다. 그는 “법이 피해자의 감정은 전혀 감싸주지 않는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대전 아파트 단지 교통사고’의 1심 판결이 당초 예정됐던 8월 10일에서 9월 14일로 한 달 이상 미뤄졌다. 김 양의 아빠인 소방대원 김모 씨(41)가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화제가 됐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사고가 벌어진 아파트 단지가 법적으로 도로로 인정받지 못하는 도로교통법의 미비점을 지적하면서 22만여 명의 청원 동의를 받았다. 정부는 올 3월 이철성 당시 경찰청장의 답변을 통해 처벌강화 등 법 개선을 약속했다.

담당 재판부인 대전지방법원 형사4단독의 이병삼 판사는 이달 8일 피고인 김 씨의 변호인이 제출한 재판 연기 신청을 다음날 받아들였다. “피해자에게 사죄를 하고 합의를 하겠다”는 가해 운전자 김모 씨(45) 측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앞서 검찰은 6월 피고인 김 씨에게 금고 2년을 구형했다. 금고는 징역과 달리 강제노역이 없는 구속이다.

서 씨는 “가해 운전자 김 씨와 합의할 의사가 없고, 이 점을 공판과정과 탄원서에서 분명히 했는데 법원이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선고가 연기된 뒤 가해 운전자 김 씨 측이 “사과를 하겠다. 합의하고 싶다”며 연락을 하거나 찾아오는 게 서 씨로서는 부담스럽다. 최근에는 서 씨가 일하는 대전의 소방서로 김 씨가 직접 찾아와 소방서 동료 직원들이 돌려보내기도 했다. 서 씨는 접근금지 신청을 하는 것까지 생각해봤다고 한다.

서 씨는 “나는 내 눈 앞에서 숨져간 딸에게 심폐소생술(CPR)을 하고서도 살리지 못한 충격에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다. 가해 운전자의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그 때의 아픔이 떠올라 발작을 일으킨다. 후속 조치(도로교통법 개정)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정부와 국회,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면서 고통은 우리 가족이 모두 떠안게 됐다”고 호소했다.

서형석기자 skytree0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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