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신치영]고속철과 화장품 용기의 동병상련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7일 03시 00분


코멘트
신치영 경제부장
신치영 경제부장
중국의 고속철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전 세계에 깔려 있는 고속철도 노선의 3분의 2가 중국에 놓여 있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속철도가 중국에서 달리고 있다. 중국은 세계 102개 나라에 1430억 달러(약 153조 원)의 고속철을 수출했다. 우리나라는 이런 중국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싱가포르 주롱이스트 고속철 사업(공사비 약 14조 원) 수주 경쟁을 벌이고 있다. 현대로템 컨소시엄이 뛰고 있고 한국무역보험공사와 수출입은행이 지원하고 있다. 고속철 개통은 중국보다 4년 앞서지만 우리는 수출 실적이 전무하다.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우리나라 컨소시엄은 의외의 암초를 만났다. 바로 근로시간 단축이다. 우리는 중국이나 또 다른 경쟁국인 일본에 비해 기술력은 엇비슷하고, 금융조달비용은 열세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건 만리타국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 주는 근로자들뿐이다. 공기 단축과 사업비 절감은 발주처에 어필할 수 있는 강점이다. 하지만 7월이 되면 이 유일한 무기가 사라진다. 주당 52시간 근무제는 해외에 나가 일하는 근로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국내에서 더 많은 인력을 보내 교대근무를 하든 현지 근로자를 채용하든 사업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컨소시엄 관계자는 “고속철 수출의 물꼬를 트기 위해 뛰고 있지만 솔직히 자신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수많은 중소·중견기업에 근로시간 단축은 경쟁력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지난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코스닥 상장사 대표가 실명으로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경영 위기를 토로하는 글을 올렸다. 인천에서 화장품 용기를 생산하는 업체인 ㈜연우의 기중현 대표다.

“근로시간 단축을 적용하면 주당 실질임금이 43% 줄어 직원들의 대량 이직이 예상됩니다. 플라스틱 사출 업종은 3D 업무로 인식돼 내국인을 충원하기가 어렵고 중소기업이 아니어서 외국인 근로자도 채용할 수 없습니다. 수도권 규제 때문에 설비도 늘리지 못하니 앞으로 수주를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30년 넘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연매출 2500억 원, 세계 100대 화장품 기업 중 40여 개사에 납품하는 회사를 일궈냈지만 근로시간 단축은 불가항력이다. 기 대표는 “근로시간 단축을 2년 연기하거나 24시간 가동이 불가피한 업종을 예외 업종으로 지정해 달라”고 호소했다.

근로시간 단축은 세계에서 일하는 시간이 가장 긴 우리 현실에서 무작정 반대할 일은 아니다. 1991만 명에 이르는 근로자들은 일과 가정이 균형을 이루는 행복한 삶을 살 권리가 있다. 일자리가 늘어나는 효과도 있을 수 있다.

내가 걱정하는 건 정부가 ‘워라밸’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목표에 몰두해 기업들이 처한 다양한 경영환경을 깡그리 무시하고 360만 개 기업에 똑같은 기준을 획일적으로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적 석학 제러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에서 프랑스가 2000년 세계 최초로 주당 35시간의 근로시간을 시행할 수 있었던 건 정부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대폭 허용했고 노조가 탄력근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썼다. 샘소나이트 직원들은 여행용 가방 수요가 몰리는 여름에는 주당 42시간, 수요가 적은 겨울에는 주당 32시간 일하는 데 동의했고 할인점 카르푸 근로자들도 고객이 몰리는 시간대를 감안해 근무시간을 조정하기로 회사 측과 합의했다. “근로시간 단축은 기업의 인적자원 수요와 근로자의 라이프스타일이 조화를 이루도록 유연해야 한다.” 부디 우리 정부가 귀담아듣기를 바란다.
 
신치영 경제부장 higgledy@donga.com
#중국#근로시간 단축#워라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