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名문장]백성을 위해서라면 뭘 못 하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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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땅과 바다는 백 가지 재물을 보관한 창고입니다. … 씨를 뿌리고 나무 심는 일은 진실로 백성을 살리는 근본입니다. 따라서 은(銀)은 가히 주조할 것이며, 옥(玉)은 채굴할 것이며, 고기는 잡을 것이며, 소금은 굽는 데 이를 것입니다. … 마땅히 취할 것은 취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 또한 성인이 권도(權道·임시로 행하는 도)로 할 일입니다.’

― 이지함, ‘포천현감으로 재임할 때 올린 상소문’》
 

국부(國富)의 증진과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산업 광업 염업 등 모든 분야의 산업을 개발할 것을 주장한 위 상소문을 올린 인물은 16세기의 학자 이지함(李之함·1517∼1578)이다. 우리에게 ‘토정비결’의 저자로 익숙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토정비결’은 이지함의 이름을 빌려서 쓴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백성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서고, 민생을 위해 적극적인 대책을 제시한 행적이 후대에도 널리 각인되면서 비결류 책에 그의 이름을 넣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지함은 누구보다 산업과 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학자였다. 농업 이외의 여러 산업을 개발하면 그 이익이 백성에게 갈 것이니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성인도 임기응변 정책을 펼 수 있다”는 이지함의 논리는 성리학의 이념과 명분론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사회에서 매우 신선한 것이었다. ‘농본억말(農本抑末)’이라 하여 농업만을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보고, 상업이나 수공업을 천시하던 시대에 이지함처럼 적극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산업과 자원 개발을 제시한 학자는 흔치 않았다.

이지함은 포천현감으로 임명되기 이전에 주로 지방을 돌아다니며 민생의 현장을 찾아갔다. 쇠로 만든 큰 솥을 쓰고 전국을 순력했다는 기록에서는 스스로 숙식을 해결하며 현장을 누볐던 이지함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러한 경험은 포천현감과 아산현감으로 재임할 때 정책으로 실천되었다. 민생 문제 해결을 위해 자원 개발 정책을 추진하고, 오늘날 노숙인 재활 기관과 비슷한 걸인청(乞人廳)을 설치해 백성들의 자급자족을 유도해 나갔던 것이다.

그의 행적은 한산 이씨 명문가의 후손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돋보인다. 양반의 삶이 보장된 상황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현장 속으로 직접 뛰어들었고, 낮은 자세로 그들을 만나고 대화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것이었다. 신분이 천한 사람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문인으로 받아들이는 개방성을 보였다. 민생 부국 통상을 강조한 그의 사상은 박제가 등 조선 후기 북학파 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올해는 마침 이지함이 탄생한 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500년 전 인물이지만 그가 제시한 산업 개발과 민생 안정책이 옛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국부와 민생 최우선이 지금의 정치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은 아닐까?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이지함#포천현감으로 재임할 때 올린 상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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