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재 교수의 지도 읽어주는 여자]성추행 악몽 달래준 런던 대학가… 女權 운동가로 재탄생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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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버지니아 울프의 영국

버지니아 울프가 마음속 상처를 달래고 작품의 영감을 얻었던 영국 콘월의 세인트아이브스 바닷가. 김이재 교수 제공
버지니아 울프가 마음속 상처를 달래고 작품의 영감을 얻었던 영국 콘월의 세인트아이브스 바닷가. 김이재 교수 제공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박인환 ‘목마와 숙녀’)

버지니아 울프(1882∼1941·사진)의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도 이 시 덕분에 그의 이름을 친숙하게 떠올린다. 쌀쌀한 3월 영국 남부 서식스주 우즈강으로 호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천천히 걸어 들어가 생을 마감한 버지니아.

버지니아가 살았던 런던 켄싱턴 대저택은 범죄의 현장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계속된 의붓오빠들의 성추행으로 버지니아는 평생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13세 때 어머니가 눈을 감자 슬픔으로 폭군이 된 아버지는 딸들을 집 안에 가두고 괴롭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22세의 버지니아는 죄의식을 느낀다.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이 밀집한 대학가인 블룸즈버리로 이사 가면서 버지니아와 언니 버네사는 웃음을 되찾았다. 1910년대 영국에서 타올랐던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하며 버지니아는 페미니스트 운동가로 진화했다. 케임브리지대 여학생들에게 직업과 경제적 기반, 특히 ‘안에서 잠글 수 있어 안전한 방’을 강조한 연설은 ‘자기만의 방’(1928년)으로 출판됐다.


버지니아는 거리를 활보하고 공원을 산책하며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어릴 적 가족이 해마다 여름휴가를 떠났던 콘월의 세인트아이브스는 상처를 직시하고 영감을 얻는 ‘비밀 정원’이었다. 탁 트인 바다와 아름다운 자연은 작품 속 단골 배경이 되었다. 소설 ‘등대로’(1927년) ‘파도’(1931년) 등의 등장인물은 그의 부모와 가족, 지인과 많이 닮았다. 런던에서 6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숨 막히게 아름다운 해안과 등대가 있는 풍경을 보면 난해하다는 그의 소설이 저절로 이해된다.

남성 지식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버지니아는 가난한 유대인 레너드 울프를 인생의 동반자로 선택했다. 여성 작가에게 기회가 극도로 제한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울프 부부는 런던 교외 리치먼드에 호가스 출판사를 차렸다. 템스강과 큐가든 왕립식물원 근처 조용한 주택가에 있는 이 출판사에서 T S 엘리엇,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책과 함께 ‘밤과 낮’(1919년), ‘야콥의 방’(1922년), ‘댈러웨이 부인’(1925년), ‘올랜도’(1928년), ‘3기니’(1938년) 등 버지니아의 히트작이 나왔다.

울프 부부는 서식스의 ‘몽크 하우스’를 구입해 글을 쓰고 친구들을 초대하는 별장으로 활용했다. ‘여성인 내게 조국은 없다’며 답답해하던 버지니아는 바다 건너 유럽을 자주 여행하며 출판 시장도 개척했다. 하지만 파시즘의 광기와 전쟁으로 런던 집은 무너졌고 여행도 떠날 수 없게 됐다.

강은 바다로 흘러간다. 그의 마지막 순간은 첫 소설 ‘출항’(1915년)과 교차된다. 버지니아는 서러운 이야기의 나약한 주인공이 아니다. 트라우마를 극복한 생존자, 경쾌하고 세련된 문체로 ‘의식의 흐름’ 기법을 실험한 혁신가, 새로운 세계를 치열하게 탐색한 탐험가로 그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김이재 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버지니아 울프#여성 참정권 운동#페미니스트 운동가#자기만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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