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東亞]加 스코필드 ‘조선 발전 위한 제언’ 창간호에 실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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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조선을 사랑한 외국인과 동아일보의 인연

“나는 캐나다인이라기보다 조선인이라고 생각됩니다.…저도 항시 조선인에 관하여 연설합니다.”

3·1운동 당시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조선 이름 석호필·石虎弼·1889∼1970) 박사. 1931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고하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에게 보낸 성탄절 편지가 그해 12월 26일 동아일보 1면에 실렸다.

스코필드 박사는 제암리 학살 현장 사진을 촬영하는 등 3·1운동 현장과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전파한 인물이다. 본보는 1920년 4월 1일 창간호에 조선의 발전을 위해 조언한 그의 글을 실었다. 그는 일제의 강압으로 캐나다로 돌아가야 했지만 이후에도 동아일보는 동양척식회사를 비판하고 일경의 고문을 고발한 스코필드 박사의 글을 실었다가 발매반포금지 압수 처분을 받았다. 1926년 6월 그가 조선에 다시 왔을 때는 사진과 함께 기사로 환대했고 인촌 김성수 선생 자택에서 환영회를 열었다.

이처럼 동아일보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외국인들을 아끼고 사랑했다.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해 ‘일본판 쉰들러’로 불리는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79∼1953) 변호사도 본보와 인연이 깊다. 1923년 의열단 사건을 변호하기 위해 한국에 온 그는 본보 주최 ‘하기순회강연회’에서 연사로 나섰다. 1927년에도 후세 변호사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만나 총독정치의 문제점을 따졌고, 동아일보는 이를 6회 연재했다.

일본의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는 1922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새로 지으며 광화문이 헐리는 것을 반대하며 ‘아! 광화문’이란 글을 동아일보에 5회 연재했다. 본보는 창간 직후 일본인으로는 처음 그의 글 ‘조선 벗에게 정(呈)하는 서(書)’를 실었고 기사는 일제 당국의 게재금지 처분을 받았다. 1921년 그의 아내인 성악가 야나기 가네코(柳兼子)의 독창회를 본보가 주최하기도 했다.

고종의 측근으로 헤이그 특사증을 이회영을 통해 이상설에게 전했던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가 42년 만에 조선 땅을 밟았을 때도 지면으로 환대했다. 그가 안타깝게 방한 일주일 만에 병으로 세상을 뜨고 영결식이 열리기까지 상세하게 보도하고 추모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동아일보#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석호필#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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