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기의 음악상담실]로미오도 오래 사귀면 지겨워요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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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의 ‘Fantasy’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늘 소개하는 곡 ‘판타지’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함께 사랑하며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흔한 이야깁니다. 꿈이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죠. 현실적으로 판단하고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하지만 연주와 멜로디는 정말 멋집니다. Earth, Wind & Fire의 최고의 노래 중 하나죠.

음악 좀 들으시는 분들은 이 노래의 베이스와 혼 섹션이 어떻게 패턴을 변화시키며 균형을 맞추는지 들어보세요. 중요한 것은 보편적으로 예상하는 것을 줬다가, 예상하지 않거나 못 했던 것을 꺼내서 놀라게 하는 것의 균형입니다. 어느 쪽도 과하면 안 되죠.

(이 노래의 백미는 마지막 50초입니다. 시끌벅적한 장터 같던 반주 위로 리드 싱어 필립 베일리가 냉면 면발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시원한 가성을 뽑아 주면 노래는 풍성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되죠. 그럼 그때까지 자제하던 금관악기들은 멜로디를 하늘 높이 날려 올리기 시작합니다.) 정신치료에서 꿈과 판타지는 숨겨진 마음으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입니다. 꿈과 판타지는 우리를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우리의 소망과 욕망이 충족되는 세상으로 데려다 주죠. 소망과 욕망의 내용은 대부분의 경우 숨기고 부정하고 싶은 수치스러운 약점과 결핍을 만회하고 극복하는 것입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은 완벽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랑을, 지배당하며 성장한 사람은 권력을, 열등감에 찌든 사람은 대단한 능력과 성취를 갈망합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소망과 욕망의 내용을 용기를 가지고 직면하면, 나의 갈등과 고통의 원인을 알게 되죠.

정신치료에서 드러나는 가장 흔한 판타지는 황금판타지(golden fantasy)입니다. 완벽하게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통해 나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은 어린아이 같은 소망이죠.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척척 알고, 나를 완전하게 돌봐 줄 특별한 누군가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줄 것 같은 사람이 생기면 완전한 돌봄을 요구하고, 사랑을 확인하려 감시하고 시험합니다. 그 사람이 잘해 주다가 조금이라도 신경을 덜 쓰거나 기대에 못 미치게 맞춰 주면 분노하고 원망하죠. 이런 판타지를 가진 사람은 스스로 성장하고, 나도 원하고 상대방도 원하고 있는 것들을 베풀고 함께 나누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환상에 장단을 맞춰 주는 사람은 슈퍼맨처럼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싶은 환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빠만 믿을게!”라는 말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쉽게 빠져드는 함정입니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백마를 탄 왕자가 되는 것은 잠시뿐이고, 그 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게 해 줄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치료는 이러한 과거의 상처에서 비롯된 허황된 판타지를 규명하고, 그 이유를 이해하고, 과거에 얽매여 헛도는 삶을 살기보다는 현실에 기반을 두고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방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삶의 윤활유가 되는, 적응적이고 삶에 도움이 되는 판타지를 가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죠. 역시 균형입니다. 다 아시는 이야기죠?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arth wind & fire#fantasy#로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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