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상준]고이즈미의 실패와 소득주도성장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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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내각의 퇴임 지지율 무려 51%
초창기 개혁 정책은 성과 내지 못해 난관
소득주도성장의 목표는 악순환 끊는 것
정치슬로건 되면서 정쟁의 도구가 돼… 목표만 분명하다면 내용은 수정 가능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현재 일본에서 아베 신조 총리를 견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치인은 이제 겨우 서른일곱 살에 불과한 고이즈미 신지로 의원이다. 그는 2001년부터 5년간 일본의 개혁을 이끌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둘째 아들이기도 하다. 아직 국가 행정에 참여해 본 경험이 없는 젊은 의원이 관록의 아베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은 개인적인 매력에 더하여 아버지의 후광이 있기 때문이다. 2006년 퇴임 시 고이즈미 내각의 지지율은 51%였다. 지난 20년간 퇴임 시 50% 이상의 지지율을 얻은 총리는 고이즈미가 유일하다.

‘성역 없는 개혁’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출범한 고이즈미 내각의 초기 지지율은 81%였다. 아직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재정 건전화’, ‘부실채권 처리’, ‘공기업 민영화’로 대표되는 그의 개혁 정책에 대한 기대 덕분이었다. 그러나 개혁과 병행하여 양적완화라는 극단적 통화 정책까지 펼쳤건만 초기에는 그다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고이즈미는 국채 발행액이 매년 30조 엔을 넘지 않도록 하겠다고 공약했지만 1년 만에 그 공약을 포기했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조세 수입이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2002년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0.3%에 불과했고 청년실업률은 8%를 넘어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경기가 악화하자 조세 수입이 감소하였고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채 발행액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경기침체는 정보기술(IT) 버블의 붕괴 등 외부적 요인에도 영향을 받았지만, 정책의 실패도 하나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10년이 넘는 국내 불황에 세계적 경기침체까지 겹치자 2001년 한 해에만 2만여 개의 기업이 도산하였다. 그 와중에 정부가 재정건전화라는 공약을 지키기 위해 재정지출을 줄이자 경기가 바닥을 친 것이다. 3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한 2002년 6월에는 내각 지지율이 39%까지 떨어졌다. 지지율 81%에서 출발한 정권이었기에 더 처참하게 느껴지는 추락이었다.

그러나 2003년부터 양적완화의 효과가 엔저를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고 부실채권 처리로 금융이 안정되고, 기업 부채비율이 감소하는 등 상황이 호전되었다. 덩달아 내각 지지율도 올라갔다. 경제가 호조를 보이고 지지율도 견고해지자 2005년에는 정부기관이던 우정국의 민영화를 추진하였다. 반대파의 극렬한 저항에 부닥쳐 총선거까지 치르게 되었지만 결과는 고이즈미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임기 마지막 해인 2006년에는 국채 발행액이 원래 공약했던 대로 30조 엔 미만으로 떨어졌다.

최근 소득주도성장을 둘러싼 국내의 논쟁을 보면 고이즈미 정권의 초기가 떠오른다. 고용과 소득분배가 악화한 것으로 보이는 통계치가 연달아 발표되자 소득주도성장을 폐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슬로건이 등장한 배경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가난한 노인은 늘어나는데 나라는 그들을 먹여 살릴 재원이 부족하다. 젊은이들이 세금을 내고 연금을 내야 재원을 마련하는데 젊은이의 수는 매년 줄어들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결혼을 기피하고 애를 낳지 않으니 해를 거듭할수록 상황은 더 악화될 뿐이다. 가난한 부모는 교육만이 그들의 자녀를 빈곤에서 탈출시키는 유일한 통로라고 믿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양질의 교육을 제공할 수 없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출산뿐만 아니라 소비도 위축시킨다. 내수시장은 점점 쪼그라들 것이고 일자리는 더 줄어들 것이다.

소득주도성장의 목표는 이 악순환을 끊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이것은 지난 대선에서 모든 후보가 공통으로 내세운 공약이었다. 대부분의 언론 역시 지면을 아낌없이 할애하여 이 문제를 다루었던 기억이 있다. 소득주도성장이 정치 슬로건으로 이해되면서 내용에 대한 토론은 사라지고 정쟁의 도구가 되어버린 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목표만 분명하다면 정책의 내용은 언제라도 수정될 수 있다. 고이즈미 내각이 개혁이라는 공약은 꾸준히 추진하면서도 일부 정책은 그 실패를 인정하고 상황에 맞춰 수정한 것이 좋은 예이다. 한편 소득주도성장을 폐기해야 한다고 믿는 정치인들은 우리 경제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다른 좋은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다음 번 선거를 대비하였으면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더 나은 정책으로 대한민국에 희망이 생기기를 소망해 본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소득주도성장#양적완화#고이즈미 준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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