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범석]日 ‘스미마센’의 두 얼굴… 사과하는 民, 안 하는 政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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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석 도쿄 특파원
김범석 도쿄 특파원
출근길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 1층을 향해 내려가다 도중에 멈췄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스미마센(죄송합니다).”

왜 사과를 할까. 자신 때문에 바로 내려가지 못해 미안하다는 걸까. 이번엔 버스 정류장 앞. 도착한 버스에 몸을 싣자마자 운전사는 “하이 스미마센(네, 죄송합니다)”, 승객들도 좁은 공간을 지나갈 때마다 “스미마센”, 버스 안은 스미마센의 도가니다.

회사 앞 편의점. 샌드위치를 사려고 하자 점원은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세요), 하이 스미마센”이란다. 돈을 건네자, 받으면서 또 “하이 스미마센”이다.

업무 중에도 스미마센의 향연은 계속된다. 업무 관계자에게 연락을 하면 전화 통화 시작부터 스미마센이다. 통화를 마칠 때는 전화를 끊기 어려울 정도로 스미마센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마치 핑퐁게임을 하듯 서로 스미마센을 주고받을 때도 있다.

외국인이 볼 때 과하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상대에게 말을 거는 것 자체를 미안하다고 여기는 일본인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폐를 끼치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 일본식 교육의 산물이라는 해석도 있다.

기업도 못지않다. 보수 공사로 며칠간 도로를 폐쇄해야 할 때면 고속도로 운영업체는 신문·방송 광고를 통해 소위 ‘배꼽 인사’를 하며 시민들의 협조를 구한다. 한 제과업체는 60엔(589원)에 팔던 아이스크림을 25년 만에 10엔 인상했다며 직원 100여 명이 고개 숙여 사과했다. 한 철도회사는 오전 9시 44분 40초에 출발할 예정이던 열차를 20초 먼저 출발시켰다며 사과를 해 해외 토픽이 되기도 했다. 내부 비리가 발각되면 사죄 기자회견은 필수다. 지난주만 해도 자동차 제조업체, 정당, 병원 등 거의 매일 ‘90도 사죄 회견’이 열렸다.

그런데 스미마센이 좀처럼 들리지 않는 곳이 있다. 지난주 국유지 헐값 매입 의혹을 받는 모리토모(森友)학원 스캔들과 관련해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상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재무성의 공문서 조작 및 은폐 사건으로 신뢰가 추락한 지 오래인 상황에서 아소 부총리는 책임을 통감한다며 1년 치 급여를 자진 반납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조작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걸 알면 이 고생을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총책임자로서 사퇴 여부를 묻는 질문에도 “내 리더십으로 재무성을 일으켜 세우겠다”고 주장했다. 15분 만에 기자회견장을 떠난 그를 두고 일본 언론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떠났다”며 날을 세웠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도 마찬가지다. 모리토모, 가케(加計)학원 수의학부 신설 등 특혜 의혹과 관련해 없다던 문서가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 선 아베 총리는 한 번씩 카메라 앞에서 머리를 숙이기는 하지만 “나는 관계없다”를 강조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비리 관여 정황이 담긴 가케학원 관련 문서 발견에 대한 진위를 묻는데도 “(가케학원) 결정 과정에는 한 점의 오점도 없다”는 식의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

11일 NHK가 발표한 여론 조사 결과에서 아베 총리의 지지율은 38%로 나왔다. 꺼진 지지율은 좀처럼 반등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일본 길거리에선 수없이 듣는 스미마센이 아베 총리와 일본 정부에서는 들을 수 없기 때문일지 모른다.
 
김범석 도쿄 특파원 bsism@donga.com
#일본#사과#아베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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