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용]사토시 나카모토의 후예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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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뉴욕 특파원
박용 뉴욕 특파원
모든 건 10년 전 짧은 논문 한 편에서 시작됐다. 2008년 10월 31일 인터넷에 A4 용지 9장짜리 논문이 올라왔다. 제목은 ‘비트코인: 개인 간 거래 전자 현금 시스템’. 저자는 ‘사토시 나카모토’. 암호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화폐 시스템을 가명으로 제안한 것이다. 그가 누군지, 아직도 살아 있는지 세상은 모른다. 그저 논문 한 편과 70여 일 만에 공개된 비트코인 소스코드만 남아 세상을 흔들고 있다.

가상통화의 선두주자인 비트코인의 가치가 폭등한 건 디지털 공간에서 개인 간 익명거래가 가능한 미래 화폐의 잠재력을 보고 젊은 투자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전화기를 한 사람만 갖고 있으면 아무 가치가 없지만 둘이면 쓰임새가 생기고, 모든 사람이 쓰면 엄청난 부가가치가 만들어진다. ‘네트워크 효과’다. 비트코인 가치가 참가자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얘기(멧칼프의 법칙)가 그래서 나왔다.

하지만 쓰임새는 이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비트코인 가치는 지난 1년 새 1400%가 뛰었지만, 이걸로 집도 사고 세금도 내고 빵도 사먹었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화폐의 조건 중 희소성(Scarcity)만 부각되고 교환 수단으로서의 쓰임새(Utility)는 별로 없으니 ‘돌덩이 투기’ ‘피라미드 사기’ 논란이 불거졌다.

전체 발행 한도(2100만 코인)의 80%가 채굴된 비트코인의 97%를 4%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도 교환 수단이라기보다 투기나 저장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걸 보여준다. 유통량은 적은데 수요가 크게 출렁거리면 가치가 널뛰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가치가 오늘 다르고 내일은 더 크게 다르면 실생활에서 쓰기는 더 어렵다.

현실과 유리된 가상통화는 추적을 피하기 위한 마약 거래나 돈세탁에 쓰인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오죽하면 비트코인 최대 보유자가 마약사범 단속으로 빼앗은 비트코인을 보유한 미국 정부일 것이라는 추측이 월가에서 나온다. 당국이 가상통화를 곱게 볼 리 없다.

시장의 판을 뒤집기엔 공학적 한계도 많다. 뉴욕의 투자회사 번스타인의 리사 엘리스 수석애널리스트는 “가상통화가 비자 마스터카드 페이팔 등 기존 지불결제 회사들의 생존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비자는 평균 초당 2000건, 최대 5만6000건까지 거래를 처리할 수 있지만 비트코인 네트워크의 처리 속도는 초당 7건에 그친다는 것이다. 거래 시간이 60분 넘게 걸리기도 한다.

국내 가상통화 판은 미래 가치만 보고 뭉칫돈이 밀려들던 약 20년 전 ‘닷컴버블’과 닮아 있다. 가상통화의 투기 대책이 기술 발전을 막는 ‘적기조례(Red Flag Act·19세기 말 자동차의 속도를 마차보다 느리게 의무화한 영국의 교통법)’라고 비판하는 전문가 중 일부는 당시 버블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사람이다. 누구보다 버블의 달콤함과 후유증을 잘 아는 이들이다. 모든 가상통화 거래소를 당장 문 닫게 할 것처럼 으름장을 놓은 당국의 대응이 혼란을 자초하긴 했지만, 투기 규제가 미래 기술을 다 죽인다고 과민 반응을 하는 것도 전문가답진 않다.

가상통화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토시 나카모토’의 진정한 후예라면 가상통화의 한계를 모를 리 없다. 이젠 실력으로 거품이 아님을 입증해야 한다. 관련 업계가 가상통화의 공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실생활에서 편리하게 쓸 수 있는 다양한 쓰임새를 만들어 낸다면 가상통화의 네트워크 효과는 꿈이 아닌 현실이 될 것이다. 가상통화를 둘러싼 혼란과 혼돈을 모두 규제 탓, 당국 탓만으로 돌릴 순 없다.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
#비트코인#사토시 나카모토#가상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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