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재판 중 이어폰 귀에 꽂고 노트북을…알고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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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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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첫 임용 최영 판사 서울북부지법 재판모습 공개

이어폰으로 들으며 심리 11일 서울북부지법 701호 민사중법정에서 시각장애인 최초로 임용된 최영 판사가 컴퓨터에 저장된 사건기록을 음성으로 변환해 들으며 심리하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이어폰으로 들으며 심리 11일 서울북부지법 701호 민사중법정에서 시각장애인 최초로 임용된 최영 판사가 컴퓨터에 저장된 사건기록을 음성으로 변환해 들으며 심리하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시각장애인 최초로 판사로 임용된 서울북부지법 최영 판사(32)의 재판 모습이 11일 처음 공개됐다. 이날 오전 10시 서울 도봉구 도봉동 북부지법 701호 민사중법정에 최 판사가 김대규 배석판사의 팔을 잡고 들어왔다. 법원 관계자에 따르면 외국에서는 시각장애인 판사가 주변 도움을 받아 재판석에 앉는 장면을 원고나 피고에게 공개하지 않지만 최 판사는 개의치 않았다.

○ 첨단장비 동원

이날 최 판사가 속한 민사11부(부장판사 정성태)는 공사 대금을 제대로 지불했는지 등을 두고 원고와 피고가 다투는 사건을 비롯해 10개의 심리를 진행했다. 공사 현장을 찍은 영상과 8년 전 작성한 계약서가 증거자료로 제시됐다. 다른 판사들이 종이로 된 사건 기록을 바쁘게 살펴보는 가운데 최 판사는 자신이 가져온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트북에 저장된 자료를 전자음성으로 들었다. 문서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음성변환 프로그램을 이용해 사건 기록을 눈 대신 귀로 듣는 것이다.

손으로 작성해 전자 파일로 변환하기 어려운 문서는 재판에 앞서 업무지원인 최선희 씨(30)가 대신 낭독하거나 컴퓨터에 입력해둔다. 증거사진과 같은 영상자료는 최 씨가 손으로 짚어주며 묘사해 최 판사가 연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최 판사는 간혹 키보드를 두드려 사건과 관련된 증거 기록을 찾거나 메모하는 등 재판 내내 침착하고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 피고가 변론하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경청하고 다른 판사들과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오후 재판에 피고 신분으로 참석한 임모 씨(47)는 “3월부터 변론기일마다 법원에 와 최 판사에게 재판을 받았는데 시각장애인인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며 놀라워했다.

○ 그를 위한 배려

최 판사는 매일 오전 9시 자택에서 도보 10분 거리인 북부지법으로 출근한다. 최 판사가 근무하는 민사11부실이 있는 법정동 9층에는 시각장애인용 유도블록이 설치돼 있다. 유도블록은 구내식당과 도서관 등 최 판사의 동선을 따라 깔려 있다. 법원 측이 최 판사를 위해 새로 설치한 것이다. 이창열 북부지법 공보판사는 “최 판사를 위해 최대한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민사11부실 맞은편에는 최 판사를 위한 지원실이 마련돼 있다. 지원실 벽에는 메모보드는 물론이고 사진 한 장 걸려 있지 않았다. 이곳에는 음성변환 프로그램이 깔려 있는 컴퓨터 2대와 스피커가 설치돼 있다. 키보드 상하키를 눌러 커서를 움직이면 문서 내용을 한 줄씩 음성으로 내보내는 방식이다. 눈으로 읽는 것과 비슷한 속도여서 일반인은 알아듣기 힘들지만 최 판사는 “연수원 시절부터 프로그램을 사용해 이 속도에 익숙하다”고 말했다. 이 공보판사는 “최 판사가 자료를 두 번만 들으면 내용을 거의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좋아 사건 처리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채널A 영상]최 영 “판사라는 책임감 무겁습니다”

○ 적극적인 과외 활동

최 판사는 다른 민사부 판사들과 다를 것 없이 북부지법 민사실무연구회 등 연구회 3곳에 가입해 있다. 최 판사도 다음 주부터 발제와 토론에 참여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 판사는 북부지법 내 방송동호회에도 가입해 있다. 이 공보판사는 퇴근 시간인 6시를 알리는 청사 내 방송에서 최 판사가 간혹 음악과 함께 짧은 코멘트를 내보내기도 한다고 전했다.

최 판사는 올 2월 27일 부임한 뒤 사건 22건을 처리했다. 다른 배석판사보다 사건을 적게 받은 편이라고 법원 측은 전했다. 이 공보판사는 “시각장애인 판사 임관이 처음이라 아직 사건이 적지만 적응과 함께 늘려 나갈 것”이라고 했다.

이날 소아마비 탓에 휠체어를 타고 민사법정을 찾은 강명훈 변호사(56)는 “최 판사는 평생 휠체어 신세를 진 나보다도 훨씬 큰 역경을 이겨냈을 것”이라며 최 판사를 응원했다.

최 판사는 고3 때인 1998년 망막색소변성증을 앓아 시력을 잃기 시작해 현재는 주변 밝기만을 구분할 수 있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다섯 차례 도전 끝에 2008년 시각장애인 최초로 사법시험(50회)에 합격한 뒤 올해 2월 27일 북부지법으로 발령받았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최영 판사#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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