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기고]서울 장안 불야성을 이룬 연등의 뜻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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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봄날에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읽는 기쁨을 누렸다. 늘 필요한 부분만 확인하는 방식이 몸에 익다보니 완독은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것도 알고 보면 비자발적 완독이다. 어쩔 수 없이 읽었다고나 할까. 하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숙독한다는 것이 자발적일 수는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열심히 책장을 넘기고 밑줄을 그어가며 요약문까지 정리했다. 해질 무렵 서울 성북구 길상사를 몇 차례 드나들면서 부처님 생애를 강의하며 덤으로 얻은 즐거움인 셈이다.

길상사에서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하신 법정 스님(1932∼2010)도 후학들에게 권한 독서목록으로 부처님 전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의 불교학자 와타나베 쇼코(渡邊照宏·1907∼1977)의 ‘신석존전(新釋尊傳)’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40대 무렵 전남 순천시 송광사 불일암에서 열정을 불태웠던 시절의 결과물 일부다. 와타나베는 일본 도쿄대 출신으로 인도철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유럽의 불교연구 성과를 섭취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다녀왔다. 새로운 시각으로 부처님 생애를 저술하면서 신화와 전설에 치우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에만 집중해 종교적 상징성을 흩뜨리지도 않았다. 둘 사이에서 조화와 균형을 맞춘 수작은 1966년 일본어판으로 나왔다. 한국어로 1975년 첫판이 나온 이래 출판사를 달리하여 두 번 정도 나온 스테디셀러다. 지금은 절판되어 인터넷의 중고서점을 두루 서핑해야 겨우 구할 수 있는 귀한 책이 됐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길상사 마당에는 형형색색 화려한 연등이 불을 밝히고 가장자리 구역에는 하얀 연등이 정갈한 자태로 얌전하게 자리 잡았다. 마당을 수놓은 연등줄 사이의 틈으로 보니 먼 하늘까지 연등이 걸렸다.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높다란 나뭇가지에 등을 매단 것이다. 그런 나무가 한두 그루가 아니다. 다시 눈동자의 초점을 맞추고서 오래 쳐다볼 정도로 인상적이다. 스스로를 등불 삼고(자등명·自燈明) 진리를 등불 삼으라(법등명·法燈明)는 당신의 가르침을 해마다 이렇게 연등을 통해 다시금 되새긴다. 등에 불을 켜고 어둠을 밝히는 것은 곧 내 마음 안의 어리석음과 욕심인 무명(無明)을 밝히는 지혜를 형상화한 것이다.

등도 여럿이 달다보면 남보다 높이 달고 싶은 것이 보통사람들의 심정이다. 조선시대에도 한양 사람들은 지금 서울 사람들만큼 경쟁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집집마다 마당에 몇 길이나 되는 장대를 높이 세우고 그 위에 아이들 수만큼 등을 내걸었다고 전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에서 보듯 한 길은 사람 키만큼의 치수다.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대나무를 구하기 위해 멀리 호남 땅 담양까지 오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았다. 등을 높이 달고 많이 달수록 자랑이던 그런 시절이었다. 대문에도 걸고 처마에도 걸고 장대에도 걸고 나무에도 걸고 그것도 모자라 양손에 들고서 지나온 세월이 이 땅에서 1000년 이상이다.

12일 오후 서울 종로 일대를 환하게 밝힌 연등행렬. 조계종에 따르면 이날 행사에는 10만 명이 몰렸다. 동아일보DB
12일 오후 서울 종로 일대를 환하게 밝힌 연등행렬. 조계종에 따르면 이날 행사에는 10만 명이 몰렸다. 동아일보DB
올해 연등회(燃燈會)가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세상을 밝히려는 불자들의 염원을 담아 지난 주말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조선 초기 연등회도 한양도성에서 가장 볼만한 10가지 풍광에 올라갈 정도로 화려했다. 장안은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뤘다. 땅에는 말할 것도 없고 물 위에도 등을 밝혔다. 유등(流燈)은 오늘날 청계천에 띄운 등으로 계승됐다. 연등회는 몇 년 전 대한민국 무형문화재 122호로 지정됐고 단일 품목으로는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 상품으로 해마다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올해는 남북 화해 무드를 반영한 북한지방 연등이 신상품으로 나왔다.

조선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섬긴 재상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한양도성의 십경을 읊다(漢都十詠)’라는 연작시에서 ‘종로거리의 연등을 보며(鍾街觀燈)’라는 소제목으로 시를 남겼다.

서울 성안 집집마다(長安城中百萬家)/밤새 켜놓은 등불이 노을처럼 환하다(一夜燃燈明以霞). … 동쪽 거리와 서쪽 시장이 모두 대낮 같고(東街西市白如晝) … 난간에 북두성이 걸리도록 등불을 거두지 않는구나(星斗欄干爛未收).
#불교#부처님오신날#석가탄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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