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차마 하지 못할 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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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세자가 8세였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송아지 우는 소리를 듣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물으니, 내시가 “우유를 짜서 타락죽(駝酪粥)을 만들려고 하는데 새끼가 따라와서 우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세자가 “내가 아직 소를 못 보았으니 한번 보게 끌고 오라”고 말하자 끌고 왔는데 송아지 입에 망이 쳐져 있었다. 세자가 그 까닭을 묻자 내시들이 “송아지가 어미젖을 빨까 염려해서 그 입을 막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세자가 “이것을 보니 차마 타락죽을 먹을 수가 없다. 앞으로는 동궁에 타락죽을 올리지 말라(見此, 不忍喫酪粥, 此後東宮勿令進之)”고 했다. 찬선(贊善) 송준길(宋浚吉)이 이 말을 듣고 ‘맹자(孟子)’ ‘곡속((각,곡)속)’장을 세자께 일러 드렸다.

안정복 선생(1712∼1791)의 ‘순암집(順菴集)’ 제5권 ‘보덕 정술조에게 보내는 편지(與鄭輔德述祚書)’에 수록된 이야기입니다. 세자는 뒷날의 숙종(肅宗)이 됩니다. 우유를 얻으려고 송아지의 입을 막은 광경을 본 어린 세자는 그 죽을 ‘차마’ 먹지 못하겠다고 하고 스승은 세자의 그런 마음을 칭찬합니다. ‘곡속’장은 희생으로 끌려가는 소를 본 제 선왕(齊宣王)이 “저 소가 죄도 없이 사지(死地)로 벌벌 떨며 끌려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으니 놓아주라”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리고 약한 존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인간이 타고난 착한 본성일 것입니다. 그런 세자의 모습을 하나 더 봅니다.

하루는 주상을 뵙고 돌아와 보니 내시 하나가 세자 자리에서 자고 있었다. 세자가 “이 자리를 치워 버려라”고 말했고, 이어 그 내시를 해고해 동궁에 들지 못하게 했다. 내시 수장(首長)이 와서 벌을 줄 것을 청하자 세자가 “이자는 꾸짖어서 될 사람이 아닌데 무엇하러 굳이 벌을 주겠는가(此非可責之人, 何必罪之)”라고 말했다.

겁도 없이 세자 자리에서 잤다니 아마도 어린 내시였을 겁이다. ‘이 내시는 개선의 가능성이 없으니 해고하라. 더럽혀진 자리는 치우라. 그렇지만 굳이 벌을 줄 것까지는 없다.’ 앞서 송아지를 불쌍히 여겼던 세자였으니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차마’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그 마음, 내 안에 숨어 있는 착한 본성을 깨워야 할 것입니다. 결국은 인성(人性)의 문제입니다.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세자#타락죽#우유#소#본성#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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