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용하]앱으로 대출도 받는데 등본, 초본이라니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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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서명사실 확인 시행해도 일제의 영향 받은 인감제도 아직도 건재
제4차 산업혁명 시대 다가와도 일상적인 규제들은 크게 변하지 않아
행정 편의주의 바뀌어야 신용사회로 갈 수 있어

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
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
요즘 주민센터에 가면 대기 번호표를 받고 한참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 됐다. 공무원들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 때문에 싫은 표정을 지을 수 없다. 무슨 일이 많아 항상 사람들로 붐비고 있을까? 주민센터에는 전입신고 출생사망신고 복지서비스 등 해야 할 여러 가지 많은 일이 있지만, 주민등록등초본 가족관계증명서 인감증명서 등 각종 민원서류 발급 업무가 한몫을 하고 있다. 민원(民願)은 말 그대로 주민이 행정기관에 대하여 원하는 것으로, 민원사무는 허가 인가 면허 등록 등 국가가 국민을 위해 행하는 대국민 서비스이고, 민원서류는 이를 사실 증명하는 서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민원서류 대부분은 명칭은 바뀌었을지언정 일제강점기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들 서류가 아직도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주민등록등초본과 인감증명서이다. 등초본은 특정 주소에 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약방에 감초 격으로 수시로 요구되는 서류이다. 너무 오랫동안 관행으로 내려와 등초본 제출 요구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납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정보통신기술이 세계 정상급인 나라에서 휴대전화 번호를 통한 본인 인증 후 대출도 쉽게 받는데 민원 행정은 왜 변하지 못하는지 의아스럽다.

인감 자체를 아직도 사용하는 국가가 일제에 영향을 받은 나라 외에 있을까 궁금하다. 국가의 중요 국사도 서명으로 하는 것이 허다한데 인감 제도가 아직도 건재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도장 대신 본인이 서명했다는 사실을 행정기관에서 확인해 주는 본인서명사실 확인 제도가 2012년부터 시행됐지만 이 또한 도장 대신 서명을 확인한다는 것일 뿐 근본적으로 국가가 확인해 준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어떤 법인 직원이 인터넷에서 금융 거래를 할 때 보안 목적으로 사용하는 일회용 비밀번호 생성기(OTP)의 배터리가 소진되어 교체를 위해 은행에 갔다. 은행 측에서 OTP의 배터리 소진도 재발급이라 하면서 법인인감이나 위임장뿐만 아니라 법인인감증명서 법인등기부등본에다 법인정관까지 요구했다 한다. 보안의 중요성은 이해하지만 이 정도 되면 과잉이라 할 수 있다. 보안 강화 명목하에서 절차와 과정이 엄격해도 괜찮다는 갑(甲) 위주의 인식 때문인지 동일한 업무도 과거보다 더 번잡해지는 경우가 많다. 확실한 보안 강화 기술 개발과 함께 어떻게 해야 절차를 간편하고 효과적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인공지능(AI)을 필두로 제4차 산업혁명 시대가 목전에 와 있지만 국민 생활을 불편하게 하는 일상적인 규제들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기업 활동을 부당하게 제약하는 각 법령이나 규칙 등만이 문제 되는 규제가 아니다. 각종 민원서류를 자동발급기나 인터넷 등으로 발급 가능하게 하는 등 편의 증진을 위한 행정부서의 노력이 한편으로 고맙기는 하지만, 오랜 관행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민원서류들이 지금도 필요한 것인지, 또 다른 대체 방법은 없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일상적 생활 속 규제에서 약자인 을(乙)에 대하여 각종 서류 제출을 요구하는 행정 편의주의와 어찌됐든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 전가하려는 사회 현상이 바뀌지 않으면 신용사회는 더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민원서류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지난 20여 년 전자정부 구현을 위하여 수십조 원 넘는 예산을 투입했음에도 종이문서 행정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나라장터라고 불리는 국가종합전자조달 행정서비스를 하면서 종이 제안서와 함께 각종 종이 민원서류를 요구하는 것이 예이다. 모든 민원서류의 근거 정보자료는 정부의 행정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므로 정부 및 공공기관 간이라도 민원 정보를 자동적으로 확인해 주는 능동적 시스템이 있다면 종이서류를 발부받기 위해 주민센터나 법원을 오갈 일도 줄어들 것이고, 관련 민원 업무에 바쁜 공무원도 더 긴요한 대민 서비스에 시간을 투입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데이터 활용을 제약하는 획일적인 개인정보 관련 규제 법령의 개정이 전제돼야 한다. 정보 보호가 필요하다고 정보를 통째로 제한할 것이 아니라, 각 정보의 항목별로 보호의 중요도를 구분해서 나누는 개선이 시급하다.

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
#대출#인감#등본#초본#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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