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정동]‘꽉 막힌 매뉴얼 사회’의 반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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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지진매뉴얼 비웃는 한국은 업데이트되지 않는 매뉴얼과
요령 있는 작업자의 나라
계속 업데이트되는 매뉴얼과 FM작업자의 조합이 선진국
정부 정책도 일종의 매뉴얼인데 시행착오 반추 없이 정책 나열
이 나라가 신생독립국이냐

이정동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이정동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우리말로 번역된 일본의 지진 대응 매뉴얼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허둥대는 일본의 재난 대비 시스템을 보면서 매뉴얼에 얽매인 맹점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비판을 쏟아낸 것이 불과 6년 전이기 때문이다. 매뉴얼대로 하다가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뿐만 아니라 이재민들에게 나누어준 매뉴얼이 수십 종에 달한다고 사진까지 올리면서 비꼬던 블로거도 기억난다. 한국이었으면 탁월한 임기응변으로 어떻게든 일찌감치 해결했을 것이라는 자랑도 은근히 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런 ‘꽉 막힌 매뉴얼 사회’가 만든 매뉴얼이 인기라니. 일본 정부도 최근 범정부적 대처 매뉴얼을 다시 업데이트해서 발표했는데 우리나라의 여러 조직들에서 열심히 벤치마킹을 하고 있다고 하니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생산현장의 작업자 앞에 매뉴얼이 놓여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매뉴얼대로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요령을 더해서 어찌 보면 더 효율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런 상태가 한참 지나고 나면 매뉴얼과 작업현장의 거리가 더 멀어지고 이제는 매뉴얼을 볼 필요가 없거나 보지 않는 게 더 도움이 되는 상황이 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업데이트되지 않는 매뉴얼과 요령 있는 작업자의 조합’이다. 국내 산업현장의 상황을 이보다 더 짧게 요약해 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글로벌 선진 기업에도 당연히 생산현장이 있다. 모니터링 해보면 바보스러울 만큼 매뉴얼대로만 작업을 하고 있다.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고 한눈에 척 봐도 답답하고 비효율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반전은 작업 후에 있다. 작업하는 동안 생겼던 시행착오와 개선사항을 집요하게 기록하고 철저하게 모은다. 그 경험 데이터를 바탕으로 매뉴얼을 갱신하고 작업자는 새로운 매뉴얼에 따라 또 정석대로 실행한다. 한마디로 ‘계속 업데이트되는 매뉴얼과 에프엠(FM) 작업자의 조합’이다.

그 결과 우리 작업현장에서는 매뉴얼과 다른 시행착오를 축적한 경력자가 퇴사하고 나면 신참자가 전임자만큼의 시간을 똑같이 보내면서 처음부터 시행착오를 다시 쌓아야 한다. 반면 매뉴얼이 지속적으로 개선되는 글로벌 선진 기업에서는 신참자가 일을 맡아도 축적된 시행착오 위에서 바로 출발할 수 있다.

매뉴얼을 만들고 정석대로 시행하고 시행착오를 가감 없이 기록하고 그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매뉴얼을 고쳐 나가는 이 단순한 사이클이 우리 산업현장에서는 왜 지켜지지 않는 것일까? 우선, 당면한 과제를 어떻게든 완수하는 것이 급하기 때문에 매뉴얼을 만들 시간이 없다. 설사 매뉴얼이 있어도 그걸 그대로 지키고 있자면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그뿐만 아니다. 시행착오 역시 시간이 없거나 나만의 것으로 감추고 싶거나 혹 불이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게 상책이다. 축적된 경험 자료가 없으니 매뉴얼을 최고 상태로 만들 수도 없다. 결국 해법은 최신 매뉴얼을 글로벌 선진 기업으로부터 다시 도입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악순환이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 산업계 현실은 계통발생이 없이 개체발생만 존재한다. 쉽게 말해서 과거 시행착오 경험을 부정하거나 쌓아두지 않으니 개인기와 임기응변으로 대처하게 되고 조직 시스템은 항상 같은 수준에서 맴돈다는 뜻이다.

정부 정책도 일종의 매뉴얼이다. 얼마 전 참석했던 정부 주관 회의에서 정책 자료집을 보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관련 정책들에서 무슨 시행착오 경험을 얻었는지 진지한 반추는 찾아볼 수 없는데 화려한 목표와 정책 과제들이 새로운 것인 양 생경스럽게 나열돼 있었다. 지금 막 나라 이름을 지은 신생 독립국에서 만든 리포트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인류가 현재의 문명을 이룩한 것은 여러 사람의 경험을 모으고 공유하고 전승하는 힘, 곧 매뉴얼을 만들고 개선하는 능력 덕이었다. 뒷사람은 매뉴얼로 집약된 앞사람의 축적된 경험만큼 시간을 절약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데 귀한 자원과 노력을 집중할 수 있다. 마침내 긴 시간을 지나 뒤돌아보면 그 진보가 장대하게 보일 따름이다. 집단지성의 진정한 의미가 이것이다.

선진국은 어느 특정 시점에 보면 ‘꽉 막힌 매뉴얼 사회’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모습은 ‘집요한 매뉴얼 업데이트 사회’다. 오늘도 매뉴얼 없이 바쁘기 짝이 없는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다.
 
이정동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계속 업데이트되는 매뉴얼과 에프엠 작업자의 조합#개선하는 능력#집요한 매뉴얼 업데이트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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