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정성은]몽상과 청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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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은 프리랜서 VJ
정성은 프리랜서 VJ
가난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친구의 결혼식에 가기가 망설여질 때, 주말에 모임을 자꾸 피하고 집에만 있을 때, 동창회에서 “그래도 넌 네가 좋아하는 일 하잖아” 같은 말을 들을 때. 가만 듣던 친구는 웃었다. “가슴 아프게 자꾸 그런 말 할래?” 영화를 꿈꾸는 친구였다. 며칠 뒤 문자가 와 있다. ‘네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네.’

‘남들이 하는 일은 나도 다 하고 살겠다며 다짐했던 날들이 있었다. 어느 밝은 시절을 스스로 등지고 걷지 않아도 될 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박준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에서)

어느 밝은 시절, 우리들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자유를 외치는 젊음의 열기로 가득한 어떤 영화에서 이름을 따 왔지만, 정작 그 영화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동아리였다. 시나리오는 일기장에 불과했고, 우리들은 자주 상업영화의 저열함을 논했지만, 직접 영화를 만들고 일주일 정도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주 서로를 욕했지만 속으로는 몰래 기대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들다니, 영랑아. 너라면 칸에 갈 수도 있겠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회사원이 되었다. 그 무엇도 되지 못한 나는 촬영 알바를 하거나, 글 쓰는 일을 하며 아직도 그 세계를 돈다. 부모는 정면승부 못 하는 자식이 안타깝지만 자식은 자주 고민한다. 어떻게 해야 용기를 낼 수 있는지. 어떤 날은 모든 걸 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어느 날은 실패로 끝날 시도들에 자신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졸업하고도 영화를 만드는 몇 안 되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 부러운 사람, 안녕?” 부산이었고 영화제였다. ‘밤치기’같이 빛나는 신인 감독의 작품을 볼 때면 그 친구가 생각났다. 친구 사이에 질투한다고 말할 순 없으니 부럽다고 할 수밖에. 나는 그의 작품이라면 늘 좋았다.

“넌 글로 칭찬받는 사람이 됐구나. 이제 시나리오는 안 써?” “난 내 경험을 쓰는 게 편해. 무언가를 지어내는 건 자신이 없어.” “에이, 그렇다고 아예 포기하지는 마. 예전에는 잘했잖아. 지금은 에세이가 좋다 해도, 언젠간 지겨워질지도 몰라. 너 이야기를 쓰는 게.”

친구는 연출부 생활을 잠시 멈추고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했다. 감독은 결국 장편으로 승부해야 하는데 단편만 써서, 도전 중이라고 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신나서 적지만, 다음 날이면 시들해지는 나에게는 아득한 일이었다.

“시나리오 쓰는 거 재미있어?” “아니, 재미없지.” “그런데 어떻게 써?” “원래 초고는 쓰레기래. 그래서 일단 뭐라도 쓰는 중이야. 차차 고쳐 나가야지. 누가 그러던데, 영감은 쓰는 도중에 나온대. 그치만 혼자서는 잘 안 돼서 스터디하고 있어 동아리 사람들이랑.” “아직까지 동아리에 그런 사람들이 있어?” “응, 너도 아는 사람들일걸.”

내가 멀어졌을 뿐, 여전히 그곳엔 영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끼워주라.” “조금 빡센데 할 수 있겠어?”

친구는 스터디 규칙이라는 워드 파일을 보냈다. 2주에 한 번 모인다. 안 쓰면 벌금 3만 원. “뭐야 벌금이 왜 이렇게 비싸!” “안 그러면 아무도 안 와.” 각자 멤버들의 글을 하드카피로 인쇄해서 코멘트를 달아 가져온다. “디지털 시대에 무슨 인쇄야?” “글에 대한 존중, 뭐 그런 거지.”

무수한 ‘규칙’과 ‘벌칙’을 지나니 ‘꾸준하게, 정말정말 꾸준하고 구질구질하게 글을 쓸 것’이라는 문장이 오랫동안 눈에 머물렀다.

‘포기하지 않도록 서로를 격려할 것.’ 우리 목표의 마지막 항목이었다.
 
정성은 프리랜서 VJ
#박준 산문집#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포기하지 않도록 서로를 격려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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