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전 49패… 그래도 바둑은 내 운명”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11일 03시 00분


코멘트

국내유일 우크라이나 출신 프로 바둑기사 자하르첸코씨

국내 유일의 우크라이나 프로 바둑기사 마리야 자하르첸코. 그는 바둑판에 한 수 한 수 돌을 놓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국내 유일의 우크라이나 프로 바둑기사 마리야 자하르첸코. 그는 바둑판에 한 수 한 수 돌을 놓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성적은 형편없지만 언젠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한국 바둑을 전파하는 날을 꿈꾸며 열심히 두겠습니다.”

 4년간 52전 3승 49패. 프로 바둑기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형편없는 성적. 하지만 국내 유일의 우크라이나 출신 프로 바둑기사 마리야 자하르첸코(22)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29일 만났을 때에도 그는 바둑 이야기를 하는 내내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어릴 때부터 체스를 뒀는데 아홉 살 때 우연히 삼촌이 ‘본 적 없는 신기한 보드게임’이라며 바둑을 알려줬어요. 규칙은 굉장히 쉬운데 게임 운영은 무궁무진하게 복잡한 매력에 푹 빠졌죠.”

 이후 그는 체스와 바둑을 함께 알려주는 학원에서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7년 원정경기를 떠난 러시아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한 바둑 대국장에서 한국 바둑을 전파하러 온 천풍조 9단을 만난 것. 천 9단은 여자 바둑기사가 많은 한국에서 경쟁하고 배우면 실력이 크게 늘 것이라며 한국 유학을 권했다.

 그 전까지 다른 나라로 바둑 유학을 떠난다는 걸 생각한 적이 없던 자하르첸코였지만 천 9단의 제안은 마음을 흔들었다. 실력이 늘수록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마땅한 경기 상대를 찾기 어렵던 때였다. 바둑 강국인 한국에서는 매일 강자들과 겨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지만 바둑 강국인 한국에 우크라이나에도 여자 바둑기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유학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학업을 포기하고 엄마와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유학 초기 바둑학원에서 배우던 자하르첸코는 이후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프로를 꿈꾸는 유망주들은 한국기원에서 연구생으로 공부합니다. 연구생들끼리 겨뤄 실력을 가리고 결과에 따라 1∼4조로 나눠요. 1조가 제일 잘하는 그룹이죠. 프로 데뷔 전 1조 5위까지 올랐어요.”

 자하르첸코는 2012년 프로 바둑기사로 특별 입단했다. 특별 입단은 일정 수준을 갖춘 외국인을 입단대회 없이 프로로 데뷔시켜 주는 제도다. 한국기원은 바둑 문화를 세계에 보급한다는 취지로 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국내 프로 바둑기사는 354명이고 자하르첸코를 포함해 4명이 외국인이다.

 경험과 나이 부족으로 아직은 승이 적은 상황. 프로 데뷔 후 첫 승의 기쁨은 2014년 7월 무려 28연패를 견디고 나서야 주어졌다. 바둑대회 상금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경기가 없을 땐 외국인 청취자를 위한 라디오방송 DJ, 바둑 강사 등으로 일한다. 함께 한국에 온 엄마도 학생들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치며 돈을 벌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녹록지 않은 생활이지만 바둑은 그의 미래이자 꿈이다.

 “한국 기사들이 워낙 잘 두니 성적은 형편없죠. 그래도 바둑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무대로 한국 바둑을 전파하는 게 꿈입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우크라이나#프로 바둑기사#자하르첸코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