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차지완]사과하고도 욕먹는 이정희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8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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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완 사회부 기자
차지완 사회부 기자
“병원에서 월급 받는 봉직의사 한 명의 비상식적인 잘못으로 인해 병원의 명예가 훼손되고, 환자분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을 생각하면 참담한 심정이고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지난달 말 ‘산부인과 의사 시신 유기사건’이 일어났던 호산산부인과는 사건이 발생한 지 12일째인 이달 11일에야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렸다. ‘참담한 심정’으로 쓴 사과문이지만 역효과가 났다. 사과문을 접한 누리꾼들은 ‘이게 과연 사과문인가’라는 반응을 보였다. 잘못 쓰면 사람을 죽이는 수면마취제를 허술하게 관리한 책임이 큰 데도 ‘봉직의사 한 명의 잘못’으로 몰아가려는 듯한 태도에서 실망감을 느낀 탓이다.

같은 날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도 사과의 원칙을 저버리는 발언을 했다. 이 전 대표는 4·11총선 당시 여론조사 조작과 관련해 서울 관악경찰서에 자진 출석해 놓고도 2시간 동안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어 경찰서를 나서며 한다는 말이 “나를 옭아매려 해도 헛수고”였다. 조작사건이 터졌던 3월 “담당자의 과욕으로 빚어진 실수”라면서도 “후보자로서 동료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 이유와 경위를 불문하고 사과드린다”고 말했던 게 이 전 대표였다.

이날 헛수고 발언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이 전 대표의 사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담당자의 과욕으로 빚어진 실수”라는 해명만 남게 됐다. 대기업그룹(재벌)이 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애용했던 “직원 한 개인의 불법 행위”라는 해명을 답습한 것이 오히려 놀라울 정도다.

‘쿨 하게 사과하라’의 공동저자인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와 정재승 KAIST 교수는 책에서 사과가 갖춰야 할 6가지 충분조건을 소개했다. ‘미안해, 하지만…’ 같이 사과를 하면서 구차한 해명을 하지 말고, ‘무엇이 미안한지’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하며, ‘내가 잘못했어’처럼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라고 조언한다. 이어 보상 의사와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고 마지막으로 용서를 구하라고 충고한다.

호산산부인과와 이 전 대표 말고도 우리 주변에선 이런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받고 대중의 분노를 키우는 사례를 쉽게 볼 수 있다. 지난달 말 870만 명의 고객정보 유출사고를 낸 KT 표현명 사장의 사과도 그중 하나다. 그는 10일 기자회견에서 “고객정보 해킹 사고로 걱정과 심려를 끼쳐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 이어 사과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90도 가까이 고개를 숙였지만 고객의 집단소송이라는 역풍을 맞았다. 정보유출의 피해자들이 가장 알고 싶어 하는 알맹이, 즉 보상대책이 빠졌기 때문이다. 그는 기자들의 거듭된 질문에도 “피해보상은 유출 자체보다 다른 (추가) 피해가 발생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는 말로 피해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책임의 시대에는 실수를 하지 않는 게 미덕이 아니라, 실수를 깨끗이 인정하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미덕”이라고 말했다. 그 역시 2008년 5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시절 여기자에게 ‘스위티(Sweetie)’라는 표현을 써서 성희롱 논란에 휘말릴 위험에 처했지만 사과의 6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즉각적인 사과를 통해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책의 저자들은 사과는 ‘리더의 언어’라고 했다. 실수와 잘못이 더욱 투명하게 노출되는 시대에 리더는 자신의 실수나 잘못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까지 책임져야 할 때가 많다. 우리는 언제쯤 ‘쿨 하게’ 사과하는 리더를 볼 수 있을까.

차지완 사회부 기자 cha@donga.com
#이정희#사과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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