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모임으로 시작… 한미 연결 ‘큰 고리’를 꿈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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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스케치]美뉴욕 한인청년 교류의 장 ‘고리’ 이야기

미국 뉴욕에 사는 한인 전문직 청년들의 모임인 ‘고리’(연결한다는 의미) 회원들이 2012년 9월 뉴욕의 한 바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모임이 출범했을 당시는 낯선 사람들과 교류하는 걸 어색해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더 많다. 모임이 지속되면서 구성원들끼리 관계도 돈독해졌고, 회원들 사이에서는 처음 온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거는 문화도 형성됐다. 고리 제공
미국 뉴욕에 사는 한인 전문직 청년들의 모임인 ‘고리’(연결한다는 의미) 회원들이 2012년 9월 뉴욕의 한 바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모임이 출범했을 당시는 낯선 사람들과 교류하는 걸 어색해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더 많다. 모임이 지속되면서 구성원들끼리 관계도 돈독해졌고, 회원들 사이에서는 처음 온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거는 문화도 형성됐다. 고리 제공
2011년 6월 11일 토요일 오후 미국 뉴욕 킴벌리 호텔의 ‘루프톱 바(Rooftop Bar)’. 평소 같으면 각양각색의 젊은이들로 북적거릴 시간이지만 이날만은 달랐다. 문을 열고 바에 들어오는 이들은 하나같이 검은 머리칼의 아시아 청년이었다.

바 입구에서는 10명 남짓한 젊은 남녀가 서서 손님들을 맞았다. 안내를 받고 들어온 젊은이들은 테이블 주변에 둘러앉거나 선 채로 칵테일 한 잔씩을 받아들었다. 대부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라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멀뚱멀뚱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행사장 입구에서 안내를 하던 청년들이 ‘분위기 메이커’로 나섰다. 먼저 자신을 소개한 뒤 다른 참석자들을 인사시켰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이름 직업 취미가 뭔지를 질문하면서 조금씩 서로를 알아갔다. 게임도 진행됐다. 조그만 상자에 각자 명함을 넣은 뒤 돌아가면서 하나씩 꺼내며 명함의 주인을 찾는 일종의 ‘마니또 게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어느새 분위기는 ‘사랑방 모임’처럼 화기애애해졌다.

이날 참석자는 40명. ‘고리’(연결한다는 의미)는 이렇게 첫선을 보였다. 고리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한인 청년들의 사교 모임이다. 구성원은 모두 한국인이거나 한국계 미국인이다. 현재 회원 수는 1200명에 달한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열리고 있는 이 모임에는 매번 100여 명의 회원들이 참석한다. 모일 때마다 30∼40달러(3만870∼4만1160원)의 회비를 낸다.

이국땅에서 찾은 새로운 인간관계

미국 뉴욕의 한 커피숍에서 포즈를 취한 문동지 고리 대표는 “다방면에서 최선을 다하는 한인 청년들의 모임 ‘고리’를 언젠가 한국에서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뉴욕=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미국 뉴욕의 한 커피숍에서 포즈를 취한 문동지 고리 대표는 “다방면에서 최선을 다하는 한인 청년들의 모임 ‘고리’를 언젠가 한국에서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뉴욕=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이런 사교 모임은 누가 만들었을까. 제약회사 화이자에서 재무컨설턴트로 일하는 문동지 대표(31)다. 문 대표는 중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 1.5세대’다. 필라델피아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에 있는 바클레이스 캐피털(옛 리먼브러더스)에 2008년 취직해 재무분석사로 2년간 일했다. 그는 “일자리를 잡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자 오히려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끊겼다”며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더 줄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문 대표는 평일에는 주로 일을 하며 회사 동료들과 시간을 보냈다. 주말엔 친구들을 만났다. 그러나 항상 똑같은 얼굴들이었다. 친구의 친구를 소개받아도 역시 비슷한 이력의 사람들뿐이었다. ‘내 인간관계는 왜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교회나 성당을 가면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술집이나 클럽에서 유흥을 즐기는 것도 인맥을 확장하는 한 방법이다. 그러나 문 대표는 “종교를 이용해 사람을 만나는 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며 “술집에서 새로운 사람을 가볍게 만나기보다는 좀 더 깊은 만남의 기회가 있었으면 싶었다”고 말했다. ‘고리’를 만들게 된 계기였다.

다양한 한인들끼리 교류하는 ‘고리’

문 대표는 필요한 걸 남이 만들어주길 기다리기보다 본인이 직접 무엇인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2010년 직장을 그만두고 만든 모임이 ‘고리’였다. 사람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고 싶었다. 일단 기존 인맥을 활용해 금융 디자인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10명을 모아 고리의 ‘매니저’로 영입했다.

어려서부터 타국 생활을 했기 때문일까. 그는 비슷한 배경을 공유하면서 끈끈한 관계를 쌓을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회원 범위는 ‘한국계 2030 전문직’으로 정했다. 그렇다고 의사 변호사 회계사 같은 특정 직종으로만 제한하지는 않았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어 하는’ 누구에게나 문호를 개방했다.

문 대표는 2011년 2월 뉴욕 시에 ‘고리’라는 회사를 등록했다. 2년 넘게 모든 일을 제쳐두고 고리를 키우는 데 전력 질주했다. 3년 가까이 개인 돈 10만 달러(약 1억290만 원)를 고리에 쏟아부었다.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다. “고리가 뭐하는 곳이냐”며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고, “모임이 재미없더라”고 혹평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꾸준히 한 달에 한 번가량 모임을 열었고 회원 수는 점점 늘었다. 애초 소망대로 풍성한 인간관계도 쌓여갔다. 그는 “고리를 통해 만나 둘도 없는 친구가 된 경우도 많고 결혼한 커플도 여럿 있다”고 말했다.

고리의 매니저인 박상미 한국보건산업진흥원 뉴욕지사 연구원(27·여)은 “사람들은 고리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평소에 잘 모르던 분야를 접하게 된다”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는 기회라서 꾸준히 모임에 참석한다”고 전했다.

회원들끼리 의기투합해 이웃 도와


고리는 단순한 사교 모임에 머물지 않았다. 허리케인 ‘샌디’가 뉴욕을 강타한 2012년 10월, 고리 회원 4명은 무작정 피해 지역을 찾아갔다. 해변 인근에 위치한 ‘라커웨이’라는 동네가 가장 많이 피해를 봤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교통이 마비된 상태여서 택시를 타고 2, 3시간을 달려갔다. 회원들은 자원봉사단에 합류해 음식과 물, 생활용품 등을 동네 주민들에게 전달하고 돌아왔다.

지난해 1월부터는 고리 모임 입장료에서 1달러(1029원)씩을 모으고 있다. 이 돈은 국제어린이양육기구인 ‘컴패션(Compassion)’을 통해 과테말라 소녀에게 매달 40달러(4만1160원)씩 전달된다.

회원인 정지상 대표(30)도 고리를 통해 새로운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사진 및 디자인 전문회사 ‘에쏘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그는 2011년 11월 처음으로 이 모임에 나왔고 MTV 프로듀서로 일하는 송재선 감독(30)을 만났다. 나이도 같고 관심사도 비슷한 두 사람은 이내 가까워졌다.

정 대표와 송 감독은 각자의 특기를 살려 ‘스프링마인드’라는 패션영상 제작회사를 만들었다. 매월 2000∼3000달러(205만8000∼308만7000원) 정도를 벌고 있다. 지난겨울 고리 회원들은 스프링마인드의 수익으로 뉴욕의 노숙인들에게 각각 100명분의 빵과 침낭을 나눠줬다. 정 대표는 “앞으로 이런 프로젝트를 1년에 4∼6차례 진행할 것”이라며 “영상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면서 봉사활동에 동참할 기회를 주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한국과 미국 연결하는 ‘고리’로

문동지 고리 대표(오른쪽)가 회원들과 함께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2012년 8월 열린 행사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뉴욕 시에서 주최한 이날 행사는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어울려 게임을 하는 일종의 축제였다. 고리 제공
문동지 고리 대표(오른쪽)가 회원들과 함께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2012년 8월 열린 행사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뉴욕 시에서 주최한 이날 행사는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어울려 게임을 하는 일종의 축제였다. 고리 제공
정 대표와 송 감독처럼 각기 다른 분야에서 일하던 회원들이 고리 모임에서 의기투합해 일을 벌이는 경우가 늘고 있다. 전후석 KOTRA 뉴욕지부 변호사 겸 컨설턴트(30)는 한국의 신생 벤처기업들이 미국에 안착할 수 있게 도와주는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프로즌 요거트 브랜드인 ‘16핸들스’를 운영하는 최솔로몬 대표(34), 이채영 변호사(36·여)도 힘을 합쳤다. 이들이 갖고 있는 사업 노하우와 인맥, 지식을 활용하면 한국의 신생 벤처기업들의 해외 진출도 돕고, 수익도 창출할 수 있다는 게 전 변호사의 판단이다. 그는 “미국에 사는 한인으로 늘 한미 양국의 상생적인 발전에 관심이 있다”며 “프로젝트 이름을 한국(Korea)과 미국(US)을 연결(Connect)해준다는 의미로 ‘커넥서스(KOnnectsUS)’로 지었다”고 했다. 커넥서스 프로젝트는 조만간 정식 법인으로 설립될 예정이다.

지난해 8월부터 제약회사 화이자에서 재무컨설턴트로 일하기 시작한 문 대표도 적극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돕고 있다. 그는 “이 프로그램은 한국의 신생 벤처기업들에 각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들을 연결해 주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되자는 사명을 갖고 힘을 합쳐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고리는 뉴욕에서 시작했지만 지난해 보스턴과 워싱턴에서도 모임이 결성돼 정기적인 행사가 열리고 있다. 회원들은 미국뿐 아니라 서울, 런던 등 다양한 대도시에서도 고리 모임을 준비 중이다. 2년 전 회원으로 가입한 전 변호사는 “우리의 모토는 좋은 사람들을 연결해줬을 때 발생하는 힘을 믿는 것”이라며 “사람과 사람, 생각과 생각을 연결해줬을 때 어마어마한 시너지가 생기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들의 꿈은 단순히 한인 전문직 젊은이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의 여러 방면에 영향력을 발산할 꿈을 꾸고 있다. 문 대표는 “모임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많은 가치가 창출된다는 걸 깨달았다”며 “앞으로 단순히 사람을 연결해주는 것을 넘어 문화와 문화, 세대와 세대, 단체와 단체 등을 연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한인#한미교류#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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