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15년, 도망친 노비 26만명 붙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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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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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추노’ 뜨면서 조선의 노비-노비제도 큰 관심

‘추노’에서 도망쳤다 붙잡혀 벌로 얼굴에 ‘노(奴)’자와 ‘비(婢)’자가 각각 새겨진 업복(공형진·왼쪽)과 초복(민지아). 사진 제공 KBS
‘추노’에서 도망쳤다 붙잡혀 벌로 얼굴에 ‘노(奴)’자와 ‘비(婢)’자가 각각 새겨진 업복(공형진·왼쪽)과 초복(민지아). 사진 제공 KBS
《조선시대 노비(奴婢)의 실생활에 대한 관심이 높다. 도망간 노비를 쫓는 추노(推奴)꾼을 다룬 KBS2 수목드라마 ‘추노’의 인기 때문이다. 추노꾼을 고용할 정도로 도망가는 노비가 많았을까, 추노꾼은 실제 존재했던 직업일까, 노비들은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었을까….》

■ 추노꾼 있었나
문헌 확인 안되지만 존재 가능성
종 쫓는 관청 ‘추쇄도감’은 있어

■ 얼굴 낙인은
조선 전기엔 실제로 찍은 듯
도망자 많아지며 어려워져

■ 노비도 재산소유?
임금-식량 모아 재산축적 가능
노비 소유한 ‘부자 노비’도 있어

■ 어떻게 노비 되나
고대엔 주로 포로들로 충당
전쟁 줄면서 범죄-빚이 원인

시청자들이 우선 궁금해하는 것은 노비인 업복(공형진)과 초복(민지아)의 얼굴에 각각 낙인된 ‘노(奴)’자와 ‘비(婢)’자의 정체다. 드라마에선 두 사람이 도망쳤다 잡혀와 벌로 낙인이 찍힌 것으로 설정됐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노비를 죽이기까지 한 시대니까 불도장을 찍었을 개연성이 있지만 문헌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정수 동서대 교양교육원장(경제사)은 “조선 전기에는 찍었는데 후기로 갈수록 노비의 도망이 일상화됨에 따라 도장 찍는 게 힘들어졌다는 얘기가 있다”고 전했다.

추노꾼의 실재 여부에 대해 학자들은 “그런 직업이 존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도망간 노비를 추적하는 일은 많았다”고 말한다. 정진영 안동대 교수(사학)는 “추노 혹은 추쇄(推刷)라고 하는데, 양반이 노비를 잡으러 갔다가 오히려 목숨을 잃는 일이 있었던 사실로 미뤄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시켰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추노꾼이 존재했을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성종실록에는 세조 때 한 조정 관리가 도망간 노비를 잡으러 강진에 갔다가 그 종들에게 붙들려 몽둥이질을 당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노비의 도주는 사회적으로 큰 문제였다. 노비의 부재(不在)는 양반가의 일상생활에 타격을 입혔기 때문이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국사학)는 최근 펴낸 ‘말 타고 종 부리고’(서울대출판문화원)에서 “양반은 부릴 종이 없으면 아예 외출할 엄두를 못 냈고 식량이 떨어져도 심부름 보낼 종이 없으면 그냥 굶었다”고 밝혔다. 송 교수는 실록에 나타난 또 다른 기록들을 제시했다.

‘우리나라는 벼슬아치가 모두 나무하고 물 긷는 수고를 노비에게 대신하게 함으로써 염치를 기를 수 있게 되니, 그들에게 의지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지금 조정의 신하로서 종이 많은 사람이 얼마 없는데, 그나마 하루아침에 도망해 흩어져서 사라져버리면 사족(士族)이 그 집안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성종실록)

이런 점을 감안해 나라에서도 추노를 담당하는 추쇄도감이란 관청을 뒀다. 성종실록 15년 기록에서 추쇄도감은 “잡아서 돌려보낸 서울과 지방의 노비는 모두 26만1984명”이라고 보고했다.

어떤 사람들이 노비의 멍에를 썼을까. 드라마에서 송태하(오지호)는 군량미를 빼돌렸다는 누명을 쓰고 훈련원 교관에서 노비로 전락했다. 포수였던 업복은 빚 때문에 노비가 됐다. 송 교수는 책에서 “전쟁이 많았던 고대에는 포로를 주로 노비로 삼았으나 전쟁이 점차 사라지면서 채무관계나 범죄 때문에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노비의 도주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회 혼란을 틈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양반가에선 이를 막으려 갖가지 방책이 등장했다. 드라마에선 “노비들의 옷고름을 기둥에 묶어 놓으면 도망칠 생각을 못 한다” “노비들 머리카락을 태운 뒤 재를 아궁이에 넣으면 노비가 돌아온다” 등의 속설이 나온다. 실제로 ‘성호사설’에는 도망간 노비의 이름을 종이에 써서 대들보 위에 붙여 놓으면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는 풍속이 기록돼 있다.

드라마에서 업복은 “돈을 모아야 한다”고 말한다. 노비도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정 교수는 “노비가 월급이나 토지, 식량을 제공받는 경우도 있었다”면서 “집과 가축을 가질 수 있었으며 드물지만 부유한 노비가 또 다른 노비를 소유한 예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 원장에 따르면 18세기 들어 노비제도는 붕괴하기 시작한다. 노비 매매가 급증하고 이에 따라 노비 가격이 폭락했다. 이 원장은 “17세기에 20냥 정도였던 노비 가격이 18세기 이후로는 3, 4냥까지 떨어졌다”면서 “도망이나 태업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비용에 비해 노비의 효용이 점점 줄어들어 노비 소유에 대한 집착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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